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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업별노조의 역사와 교훈
석치순 국제노동자교류센터 국제운영위원장·공공연맹 전 위원장


들어가며

지난 4월 25일 일본 오사카 부근 아마가사키(尼ヶ崎)에서 일어난 JR서일본의 열차 사고는 107명의 사망자와 500여명의 부상자를 낳은 대형 참사였다. 더구나 이번 사고는 그 규모에 있어서 뿐 아니라 사고의 원인에 있어서도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 밝혀진 바와 같이 사고의 원인이 1분 30초의 지연운행을 회복하기 위해 곡선구간에서 약 50Km 이상 과속했던 것에 있었다고 한다면, 금번 사고는 명백한 인재(人災)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인재가 무차별적인 구조조정과 인력 감축, 그리고 이로 인한 노동자들의 과다한 스트레스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는 점에서 이번 사고는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일본 노동운동의 현주소이다. 사고의 배경을 파헤쳐 보면 침체의 나락에 떨어진 일본 노동운동의 무기력과 무능, 그리고 그 속에서 임금노예가 되어버린 일본 노동자들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1987년 국철이 분할·민영화되어 7개의 회사로 나뉘어진 JR은 지난 18년 동안 이윤과 경쟁의 논리아래 무차별적인 구조조정과 합리화를 추진해 왔고, 그것은 결국 인원감축과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강도 강화로 귀결되었다. JR 7개 회사 중에서도 특히 JR서일본의 공격적 구조조정과 합리화공세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오로지 효율성과 이윤의 논리만을 앞세워 노동자나 승객의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금번의 대참사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JR 서일본은 이미 지난 1991년에도 42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한 대형사고(信樂철도사고)를 냈다. 이 때문에 무엇보다 안전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으나, JR서일본의 경영진은 안하무인이었고, 이윤추구 위주의 공격적 경영은 계속되었다. "Speed Up, Cost Down" 이 지상 명령이었다. "정시운전확보" 라는 명분 하에 단 1분이라도 열차가 지연되면 해당 기관사는「日勤근무」(지상근무)를 해야 했다. 일근근무라는 것은 승차근무를 시키지 않고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반성문과 레포트를 쓰게 하거나, 심지어 풀뽑기를 시키는 등의 체벌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극도의 모멸감과 자존심의 손상에 견디지 못해 자살자가 속출했다. 그럼에도 JR서일본은 구조조정과 노동자들에 대한 감시, 비인간적 노무관리를 멈추지 않았다. 기관사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노이로제 속에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결국 대형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무대포적인 공격경영과 비인간적인 노무관리가 가능했던 비밀은 바로 노동조합에 있었다.

1980년대 일본 노동운동이 침몰하면서 주도권을 잡은 노사협조주의, 실리주의 노선의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을 "제2의 노무부" 로 전락시켰다.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생존권을 위한 최소한의 저항은커녕, 자본과 경영진을 대신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앞장섰다. JR서일본의 다수파노조(JR서노조)가 그 대표적인 노조였다. 이런 노조가 있었기 때문에 JR서일본은 아무런 걸림돌 없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의 구조조정을 할 수 있었고, 그것이 결국 오늘과 같은 참사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JR서일본의 어용노조의 존재, 그것이 이번 사고의 또 다른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노사협조주의 어용세력이 일본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된 배경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960-70년대의 전투적이고 계급적 투쟁의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노동운동이 그 전투성과 계급성을 거세당하고「JR서노조」와 같은 노사협조주의 어용세력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배경에는 일본 노동운동의 체질적 한계, 즉 기업별노조라는 "체질"의 문제와 또한 그 속에서 복수노조가 기능했던 역기능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JR서일본에는 5개의 복수노조가 존재한다. 약 3만 명의 조합원 중 27,000명을 조직하고 있으면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제1노조인「JR서노조」가 바로 (구)국철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노사협조주의세력을 대표하는 노조이다. 그야말로 회사의 노무관리를 대행해서 수행하는「제2의 노무부」로 기능하며 앞장서서 회사의 구조조정에 협조해 왔다. 이윤과 효율성, 생산성의 향상만이 이들의 노선이고 강령이었다. 이들은 노동조합으로서의 기본의 기본마저 잊어버린 채, 자신들의 조합원을 자살로 몰아가고, 무고한 승객들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든 공동정범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과 노선을 달리하는 나머지 4개 노조는?  불행하게도 이들 노조의 영향력은 전무한 것이나 다름없다. 3만 명 중 1,000명, 500명의 소수파노조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거대 어용노조의 전횡을 막기 위해 서로 똘똘 뭉쳐도 될까 말까한데, 자기들끼리도 또 노선이 다르고 파가 다르다며 4개로 찢어져 있는 현실은 그나마의 힘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만들었을 따름이다.  


이제 우리도 1년 반 후면 복수노조시대를 맞게 된다. 더구나 그것은 전임자지급금지와 셋트로 예정되어 있어 그 위력은 우리 운동의 지형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들 수 있는 메가톤급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반면, 이러한 객관적 정세는 그렇지 않아도 기왕에 추진되어온 산별노조건설의 프로세스를 보다 가속화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보다 먼저 기업별노조와 기업별노조 체계 하에서의 복수노조 문제를 경험한 일본 노동운동의 역사와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과 교훈을 줄 수 있다.




본론 - 일본 기업별노조의 역사  


1. 일본노동운동의 현주소 및 일반 현황


일본 노동운동의 현재


O 日經連(우리의 경총) 설문조사 → 사용자들의 95%가 노조에 대해 긍정적 평가

O 조직율 → 19.2%로 하락

O 올해 임투 → 4-5년째 연속 임금동결, 호봉인상도 정지 또는 폐지

O 1000명당 파업으로 인한 노동손실일수 → 한국 : 111일/ 일본 1일

O 계속되는 공공부분의 민영화

→ 1985년 통신공사, 전매공사의 민영화 → NTT/ JT로

→ 1987년 국철 민영화 → JR로

→ 2004년 4월 → 동경지하철, 나리타국제공항 민영화

→ 현재 → 체신, 도로공단, 건강보험청(사회보험) 민영화 추진

O 지난 4월 25일의 JR서일본 아마가사키 열차 사고

O NTT 자회사 100여개 이상으로 분할 → 10만 명, 자회사로(55세 이상 의무적)


 일본 노동운동 일반현황

O 노동조합 수 : 약 62,800개

O 조합원 수 : 1,030만명 (민간부문 85%, 공공부문 15%)

O 추정 조직률 : 19.2%

O 비정규직 비율 : 약 30% (비정규직의 조직율 : 3.3%)

O 조직율 변화(감소)의 추이

O 조직율 감소의 주요 원인

    1) 산업구조의 변화 - 제조업 감소, 서비스업 등의 증가

    2) 노동력의 유동화 - 비정규직의 증가, 확산

    3)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조직화의 실패

    4) 노동자 의식 및 가치관의 변화, 개인주의적 경향, 탈조합화 현상

O 렝고(연합)는 89년 당시 조합원수 800만 명으로 출범하면서 수년 내에 [1,000만 렝고]시대를

열겠다고 기염을 토했으나 현재는 오히려 670여만으로 감소

O 협력적인 노사관계 하에서도 조직율이 줄어드는 이상 현상

O 내셔널센터(총연맹)의 분립

    1) 연합(連合 - 렝고) : 672만 명

    2) 전노련(全勞連) : 98만 명 - 공산당계 (국가동무원노조 등)

    3) 전노협(全勞協) : 16만명 - 舊사회당 좌파계 (국철노조, 동경都노조 등)

O 80년대부터 쟁의의 격감, 90년대 이후엔 일부 중소사업장을 제외하고는 전무한 상태

O 노동조합에 대한 조합원의 무관심, 이탈 현상 점증

O 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을 상실

O 노동자정당, 진보정당의 부재


2. 일본 노동운동사 개괄


O  1868년, 명치(明治)유신으로 일본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1897년「철공조합」이 결성됨으로써 노동조합 및 노동운동이 태동.

O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에 돌입하면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져 노동조합활동이 전면 금지되고 노조는 해산 당하게 됨. 1945년 패전 당시 노동조합은 한개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

O  1945년 8월의 패전과 함께 미국에 의한 점령통치가 시작됨. 일본의 민주화를 추진하기 위한 미군의 초기 점령정책에 의해 노동조합의 결성이 적극 권장되는 등, 위로부터 열린 민주화의 공간 속에서 노동조합의 급속한 조직화가 이루어짐. 그 결과 불과 1년 만에 1만개 이상의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조합원 수 360만 명, 40%의 경이적인 조직율을 기록하게 됨. 그러나 반면 급속하게 진행된 노동조합의 결성은, 불가피하게 기업별노조가 주종을 이루게 되는 결과를 빚어 결국 일본 기업별노조의 전통을 뿌리내리게 하는 원인이 됨.

O  전쟁 전부터의 뿌리 깊은 전통인 일본 노동운동의 분열은 전후 노동조합의 재조직화 상황에서도 이어져 내셔널센터의 경우, 공산당계가 주도한 급진적?전투적 노선의「산별회의(160만)」와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을 잇는「총동맹(80만)」으로 양분되었으나, 초기에는 패전직후의 혁명적 분위기와 좌익세력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미 점령군의 태도에 편승하여 공산당계인 산별회의가 주도권을 장악함.

O  억눌린 민중의 불만과 분노가 전후의 피폐한 생활고와 맞물려 폭발적으로 분출되면서 노동운동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투쟁의 분위기는 점점 상승하여 혁명적인 열기를 띠게 됨.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계획된 1947년의「2.1총파업」이 점령군사령관 맥아더의 중지 명령에 의해 좌절되면서 일본 노동운동은 전후 첫 번째의 굴절을 겪게 됨. 또한 이 투쟁을 주도한 산별회의와 공산당은 결정적인 순간에 무기력하게 굴복함으로써 대중들로부터 불신을 사게 되어 조직의 위상에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됨. 또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노동운동 내에 소위 "(반공)민주화운동" 을 명분으로 산별회의?공산당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가시화되고 조직화되면서 산별회의의 균열이 발생. 이어 동서냉전이 본격화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면서 미국의 점령정책 역시 초기의 민주화정책으로부터 반동적 정책으로 U턴하게 되면서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통제와 탄압이 강화되어 1948년, 공무원들의 단체교섭권과 쟁의권을 박탈하는「정령201호」가 발효되고, 49년에는 무노동 무임금, 전임자 임금지급금지등의 노동법이 개악됨.

O  1950년의 한국전쟁은 일본 경제에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제공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미국 점령정책의 반동화를 더욱 부채질하게 되어 한국전쟁을 계기로 노동현장의 활동가 1만명 이상이 추방(해고)되는 소위 「레드퍼지」(빨갱이 사냥)가 자행됨.

O  좌파 세력에 대한 탄압과 동시에 노동운동의 재편이 획책되어 탄압과 내부분열로 급격하게 조직력을 상실해 간 산별회의가 해산으로 몰리게 되고 미 점령군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내셔널센터「총평」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이 1950년 7월에 결성됨.

O  그러나 총평은 그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결성 후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51년경부터 좌파가 지도부를 장악하면서 급격히 좌경화하여 전투적?계급적 노선으로 선회, 이후 20여년간 일본노동운동을 이끌면서 그 전성기를 구가하게 됨.

O  1955년, 총평은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 임단투 투쟁에 있어 산업별, 연맹별로 시기를 집중하는 방식인 소위「춘투」를 시작하게 됨.

O  춘투는 때마침 맞이한 일본의 고도성장과 맞물려 고액의 임금인상을 획득하는 등 성과를 내면서 일본식 노동운동의 독특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됨. 경제적 측면에서 조합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참여를 확산시켰다는 성과를 가져온 반면, 기업별노조의 극복이라는 애초의 의도와는 반대로 기업별노조의 고착화, 경제투쟁에의 매몰, 투쟁의 이벤트화?형해화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여 결과적으로는 역설적이지만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과 노동운동의 체제내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음.

O  1960년 일본을 뒤흔든 정치투쟁인「안보투쟁」과 시기를 같이하여 벌어진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결"이었던「미이께(三池)탄광 파업」은 282일간의 격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노동측이 패배함으로써 1947년의 2.1총파업의 실패에 이어 전후 일본 노동운동에 있어 두 번째의 커다란 좌절과 굴절을 맛보게 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중요한 하나의 분기점이 됨. 즉 이 투쟁의 패배를 계기로 노동운동내의 이데올로기적 주도권이 정치주의적?계급투쟁적 노선으로부터 경제주의적 노선으로 좌표이동이 시작됨.

O  이후 60년 말부터 시작된 일본 정부의「국민소득 배가계획」이 고도성장과 맞물려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여 조합원들의 경제적인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게 되고, 이런 상황을 반영한 민간대기업 중심의 노사협조주의를 표방한 조직인「동맹」이 1964년에 결성됨으로써 공공부문노조가 주축이 된 [총평]으로 대표되는 전투적? 계급적 노선과 민간대기업노조 중심의 [동맹]으로 대표되는 협조주의?경제주의 노선의 양대 세력이 팽팽하게 맞서게 됨.

O  1973년 가을의 오일쇼크로 고도성장이 끝이 나고, 유례없이 높은 인플레 속에서 진행된 74년 춘투에서 사상 최고의 32.9%라는 임금인상을 획득하기도 했으나 [동맹]의 민간대기업노조의 리더들에 의해 국민경제의 안정적 발전, 물가 안정 등을 이유로 한 소위「임금자숙론」「경제정합성론」등이 대두되면서 경제주의, 나아가 국민주의적 경향이 노골화되고 이들 노사협조주의 세력이 노동운동 내 노선 투쟁에서도 서서히 우위를 점하기 시작함.

O  1975년 11월, 총평의 핵심 대오였던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은 1948년 파업권이 박탈된 이후 수 십년 간의 숙원이었던 "파업권 탈환"을 위한「파업권 파업」을 전개함. 국철?체신?전기통신공사노조 등 [공노협] 산하 9개노조 86만명의 8일간에 걸친 전면 총파업과 100만명의 [자치노], 4만여 지하철?시영버스노동자들의 조직인 [都市交]가 부분파업으로 가세한 이 투쟁은 총파업으로서는 전후 최대, 최장규모의 파업투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스컴과 국민들의 비난여론을 등에 업은 정부의 강경대응에 의해 아무런 성과 없이 패배로 종결됨으로써 일본 노동운동은 세 번째 큰 좌절을 맛보게 되고 공공부문?총평을 중심으로 한 전투적 일본 노동운동이 사실상 그 막을 내리게 되는 계기가 됨.

O  이후 공공부문 노조와 총평의 약화가 눈에 띄게 진행되어 노동운동내의 역관계에 있어 민간대기업노조와 이를 대표하는 동맹이 우위를 점하게 되고, 이에 의해 일본노동운동의 우익적 재편이 더욱 가속화됨.

O  80년대 초 레이건, 대처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를 자임했던 자민당의 나카소네 수상이 집권하면서 신자유주의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주요 공기업의 민영화가 추진되어, 1985년에 전기통신공사(NTT)와 전매공사(JT)가 민영화되고 이어 일본 노동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던 일본국철이 1987년 4월에 민영화됨으로써 총평과 공공부문노조는 마지막 남은 근거지를 상실.

O  1989년 11월, 일본 노동운동의 전선 재편이 이루어져 이미 주도권을 상실한 채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총평이 민간부분에 흡수?통합되어「연합」(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으로 재편됨으로써 전후 일본 노동운동의 우익재편이 완료됨.

O  1990년대 이후의 일본 노동운동은 전반적인 경제 침체와 강화되는 국제 경쟁, 격화되는 신자유주의의 공세 앞에서 현장과는 유리되고 계급성과 전투성을 상실한 채 최소한의 저항조차 조직하지 못하고 급격하게 퇴조, 몰락의 길을 걷게 됨. 생산에 협조하고 분배에 참여한다는 경제주의의 당의정을 빨아먹다 노동운동의 기본적 이념마저도 상실한 노동조합 리더들의 관료화, 도덕적 타락과 조합원들의 무관심, 조합 이탈 현상이 가속화되는 악순환 속에서 일본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 앞에 저항은 커녕, 노동자의 최소한의 이해도 대변하지 못한 채, 한마디로 "제2의 노무부" 로 전락한 상태.


3. 일본 기업별노조의 형성과 고착화 과정

3-1.  일본 기업별노조의 형성 배경

O  일본에 기업별노조가 생성된 것은 패전 직후 펼친 미 점령군의 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일본의 민주화를 위해 노동조합의 결성을 적극 권장?육성키로 한 점령군의 정책에 의해 급속한 노동조합의 결성이 이루어졌고, 전쟁으로 인해 극도로 피폐한 산업과 악화된 민중의 생활고에 의해 하루라도 빨리 노동조합을 만들어 싸워야만 했던 상황 역시, 노조를 만드는데 있어 가장 빠르고 손쉬운 방법을 택하게 한 주요한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빠르고 손쉬운 방법은 기업별, 공장별, 사업장별로 노조를 결성하는 것이었고 그 움직임은 순식간에 전국을 휩쓸면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활동가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설계도를 그릴 사이도 없이 현장노동자들에 의한 노조 결성이 진행되었다. 현실이 이론을 앞서가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당시 노조결성을 주도했던 좌파는 물론이고 우파의 리더들도 의식적으로는 산업별노조의 결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나, 전국 각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는 기업별노조 결성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고, 일단은 여기에 편승하게 된다.

O  또한 여기에는 사용자 측에서도 어차피 노조가 생길 바에는 기업별로 만들어지는 것이 좋겠다는 인식에 의해 받아들이기가 쉬웠다는 점, 전쟁 중의 어용조직인 [산업보국회]가 각 기업, 공장별로 존재했던 것도 기업별로 노조를 만드는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O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노동운동을 주도한 일부 공산당계 활동가들의 경우, 기업별노조를 사회혁명의 기초조직인 공장소비에트의 단초로서 설정해 보려했던 희망적 발상도 일부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O  이로 인해 패전 직후 결성된 노동조합은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기업별노조였다. 보다 정확히는 기업별이라기보다「작업장별, 사업장별 노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국철의 경우, 각 현장별로 수 십 개의 노조가 결성되었고, 민간기업 역시 같은 회사라 하더라도 각 공장, 현장별로 별도의 노조가 결성되었다. 그것이 점차 기업별로 통합되어 기업별노조의 형태가 완성되어 갔다.


3-2. [산업별노조주의]의 패배와 「기업별노조주의」의 대두

O  전후 급속한 조직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는 현장(사업장)별 노조   기업별노조의 경과를 거치면서 기업별노조가 주류로서 정착되어 갔지만, 상기한 바와 같이 당시 노동운동의 주요 리더들은 기업별노조를 선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수의 활동가들은 기업별노조는 필연적으로 어용노조화 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기업별노조로 출발하지만 빠른 시일 안에 이것을 산별노조로 재편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공산당계가 만든 내셔널센터인 [産別會議]는 그 이름에서도 산업별노조로의 지향점이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O  공산당계뿐만 아니라 당시 우파를 대표한 조직인「총동맹」역시 조직방침으로 산업별 단일노조 결성을 내걸었다. 다시 말해 전후 초기에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진행되는 현실과는 상관없이 사상적으로는「산별노조주의」라고 하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구체적인 조직화 방침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즉「총동맹」의 방침이『지역 조직을 기초로 한 산별의 조직화』,『위로부터의 조직화』 였다고 한다면, [산별회의]는『기업별조직을 기초로 한 산별 조직화』,『아래로부터의 조직화』라고 하는 점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O  따라서 전후 초기, 현실에서는 기업별노조가 주종을 이루었지만 적어도 사상적으로는「산업별노조주의」가 운동사상의 주류였고, 이와는 대극을 이루는 기업별주의는 극복의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산업별노조주의를 대표하는 노동조합과 그 투쟁이 자본의 반격과 기업별노조주의를 내건 제2노조에 의해 잇달아 패배하면서 산업별노조는 와해되거나 그 건설이 좌절되었고, 이로 인해 사상적으로도 산업별노조주의가 패퇴하고 기업별노조주의가 주류의 자리를 확보, 정착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상징적인 투쟁으로 1952년「電産」파업, 1953년의「全自」닛산(日産)분회 파업, 그리고 1957년 철강노련 파업을 들 수 있다.

(1) 상징적 투쟁 - 1952년「電産」파업

電産」의 결성과 활약

O  당시 일본의 전력부분은 전국 일원의「일본발전회사」(日發)와 전국 9개의 지역별로 분할된 9개의 배전회사 등 10개 회사가 담당하고 있었다.

O  노동조합은 국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패전 직후 각 현장(사업소)별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나 곧 기업별로 통합되어 한 개의 발전회사노조와 9개 배전회사노조, 즉 모두 10개의 기업별노조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목적의식적인 산별노조로의 전환이 추진되어 연합체(연맹)인「電産協」을 거쳐 1947년 5월에 명실상부한 산업별단일노조「電産」이 탄생하게 되었다.

O  패전 직후의 사회 전반적인 민주화의 분위기 속에서 전산 노동자들도「생산관리」(자주관리)투쟁에 참가하는 한편, 경영민주화 투쟁을 전개했다. 이「電産」노조의 경영민주화투쟁을 통해 패전직후의 혁명적인 사회분위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노조의 중앙투쟁위원회가 경영의 실권을 쥐고 비조합원인 과장 이상 간부의 퇴사 금지, 8시간 노동제 실시, 출근부의 조합관리를 추진했는가 하면, 노동조합이 과장 이상 간부들을 선출하는 곳도 있었고, 노조가 위원장·서기장(사무국장) 등 3인으로 구성하는 최고회의를 구성해 경영의 전권을 행사한 곳도 있었다.

O  경영민주화 투쟁에서 일정 정도 성과를 올린 조합은 한발 더 나아가「전기사업의 사회화」에 착수, "전기사업의 철저한 민주화, 민주혁명" 을 목적으로 "전기사업을 관료의 통제로부터 해방시켜 사회화한다, 즉 인민의 손에 돌려준다" 라는 목표를 내걸고 경영자, 노동자, 그리고 이용시민대표의 3자로 구성하는「전력위원회」의 구성을 추진했다. 이러한「電産」노조의 사상과 이에 의한 방침, 즉 경영형태의 변경을 포함하는 전면적 개혁안은 일본 역사상 노조에 의한 최초의 산업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O  이러한「전기사업의 사회화」는 국가권력과의 직접적 투쟁에 의해서만 달성 가능하며, 그 투쟁은 각각의 기업별노조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 아래 일찍부터 산업별노조건설이 추진되었다. 47년 결성한 산별노조「電産」의 경우, 중앙본부가 조합원의 가입과 탈퇴에 대한 승인권과 조합비의 50% 배분, 그리고 교섭권 · 파업지령권 · 타결권의 3권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청회사, 발전소건설회사의 노동자등「전기사업에 종사하는 전노동자」를 그 조직대상으로 했다는 점 등에서 이름만의 산별노조가 아닌 명실상부한 산별노조였다고 할 수 있다.

O 「電産」은 46년의「10월」총공세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소위「전산형임금」체계를 쟁취, 확립시킴으로써 전후 일본 노동운동에 획기적인 족적을 남겼다.「전산형임금」은 단순한 임금인상이 아니라 임금체계 자체를 자본의 논리가 아닌 노동자의 논리와 관점에 입각해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것이었다. 나아가 이런 임금체계를 통해 독자적인「산업별횡단임금체계」를 구축해 산별노조를 강화하려 했다.

O  이러한 투쟁의 성과는 14만 명에 달하는 조직 규모와 정전 파업을 불사하는 강력한 투쟁력, 전력산업이 가지는 막강한 파괴력, 그리고「전기사업의 사회화」방침에서도 볼 수 있는 높은 의식 수준 등에 의해 뒷받침되었고, 이러한 투쟁과 성과를 바탕으로「電産」은 당시 일본 노동운동의 중핵적 역할을 수행했다.

「電産」1952년 투쟁의 패배

O  이러한 전산노조를 자본과 정부 측에서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경영진, 정부, 미 점령군사령부의 집중공격이 개시되었다. 자본 측은「전산」의 힘의 원천이 산업별노조에 있다고 보고 산업별노조의 해체를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런 측면에서 1952년의「52년 전산쟁의」는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투쟁은 전후 고양된 일본 노동운동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일본 자본 측의 반격을 대표하는 투쟁이기도 했다.

O  먼저 정부와 미 점령군은「電産」의 산별체제를 와해시키기 위해 1951년「일본발전회사」를 지역별로 9개로 쪼개 각 배전회사에 귀속시킴으로써 발전·배전을 일괄 담당하는 9개 전력회사로 전력산업을 재편시켰다. 이로 인해「電産」산하 각 회사별로 기업이기주의가 태동할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되었다. (이 때의 분할책은 1987년 국철의 분할·민영화시 주요한 모델이 된다)

O  이러한 정지 작업을 거쳐 1952년의 대격돌이 벌어지게 된다. 예년과 다름없는 평범한 임단투였으나 9개 전력회사 경영진은 똘똘 뭉쳐 이례적으로 강경일변도의 대응으로 나왔다. 노조의 요구에 대한 수용은커녕, 유니온샵 폐지, 쟁의 참가금지대상자의 선정,「전산형임금」체계의 폐지 등 노조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안을 제기하면서 역공을 펼쳤다. 노조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9월 28일, 전력 생산량을 감산하는 6시간 파업을 시작으로, 치고 빠지는 파상 파업을 간헐적으로 전개, 약 2개월에 걸친 지리한 투쟁이 이어졌다. 투쟁의 수위는 에스컬레이터 되어 11월에 들어서는 총 22시간에 걸친 정전파업을 포함한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으나 자본가단체인 일경련, 정부, 미 점령군의 지원을 받은 사용자 측의 태도는 완강했다. 일경련은 성명을 발표, 전력산업 경영진에 대해 "안이한 타협을 하지 말 것" 을 촉구했다. 게다가 반드시 전산의 산별노조를 깨고야말겠다는 방침아래 사용자측은 전산노조 중앙본부와의 중앙통일교섭을 거부하는 한편, 각 회사별로, 즉 노조 지방본부와는 교섭을 하겠다고 회유하기 시작했다.

O  중앙교섭을 포기하는 순간, 산별은 깨질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에 의해「전산」중앙은 지방본부별 교섭을 금지시킬 수밖에 없었으나, 이러한 지침에도 불구하고 각 지방본부별로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착상태에 빠진 교섭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회사별로라도 교섭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이 것을 기화로 조합의 분열이 발생했다. 먼저 경영실적이 제일 좋은 회사인 동경을 중심으로 하는 關東지역의 회사에서 제2노조가 결성되었다. 이어 중부, 큐슈 지역에서도 제2노조가 생겨났다. 이들은 하나 같이 산별노조에 대한 비방과 포기, 그리고 기업별노조로의 재편을 표방했다. 한 번 물꼬가 트이자 봇물 터지듯 조합 분열과 산별로부터의 이탈이 가속화되고, 대부분의 회사에서 기업별 교섭이 추진되면서 사실상 중앙교섭이 무산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당황한 중앙본부는 지금까지 수락을 거부했던 노동위원회의 알선안을 수락하는 굴욕적 타협을 통해서라도 쟁의를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O  쟁의의 패배는 또 다른 분열의 명분이 되었다. 각 지방본부에 모두 제2노조가 결성되었다. 이들 각 회사별 기업별노조들이 모여 기업별노조의 연합체(연맹)인「電勞連」을 결성하게 된다. 이들 분열주의자들이 내세운 분열의 명분, 즉「電産」에 대한 비판의 내용은 "좌익노동조합주의에 입각한 혁명주의", "총평(당시의 총연맹)의 총알받이", "정치투쟁 중심의 투쟁 " 등등이었다.

O  처음 소수파에 불과했던 분열노조와 그 연합체「電勞連」은 사용자 측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세력을 확대, 한동안「電産」과「電勞連」의 대치국면을 거쳐 세력의 역전이 이루어졌다. 조합원에 대한 갖가지 불이익, 이지메가 자행되는 등, 집요하게 계속된「전산」와해 책동에 의해「電産」조합원의 탈퇴는 계속 이어져, 1956년에는「電勞連」10만 명에 비해「電産」의 조합원은 4만 명으로 줄어들어 세력판도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결국 수년 후, 한 때 "빛나는 電産"으로 불리면서, 전후 일본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였던「電産」노조는 와해되고 말았다.

(2) 산업별노조주의의 패퇴

O 「電産」의 패배는 전후 일본 노동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역시 산업별노조의 모범, 전형이 깨어져 버린데 있다고 할 수 있다.「電産」의 패배는 전산노조를 모델로 해서 산별노조를 추진하고 있던 다른 노조들에게 좌절감과 자신감의 상실을 안겨 주었다. 우선「電産」의「전산형임금」체계를 모델로, 산업별횡단임금체계를 추진하고 있던 자동차산업의 산별노조인「전일본자동차산업노동조합」(全自)의 산업별횡단임금쟁취투쟁에 제동이 걸렸다. 이어 이듬 해 1953년,「全自」의「日産」분회 파업을 계기로「電産」과 유사한 경로(제2노조의 분열과 파업의 와해)를 거쳐「日産」분회의 투쟁은 패배하고, 그 여파로 산별노조「全自」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결국은 산별노조가 해체되어 기업별노조로 재편되고 말았다. 또한 같은 해, 공동투쟁을 통해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던 철강산업 노동조합의 연합체였던「철강노련」의 투쟁에서도 핵심 대공장노조였던 야와타(八幡)제철노조와 후지(富士)제철노조가 사측의 회유에 넘어가 공동투쟁에서 이탈함으로써 산별 노조건설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

O  또한 전산의 패배는, 비록 현실적으로는 기업별노조가 대세였지만 이론, 사상적으로는 우위를 점하고 있던 산업별노조주의가 사상적으로도 패퇴하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일본에 산별노조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 극히 어렵다고 하는 패배감을 심어주어 산별노조 추진을 포기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내셔널센터인「총평」노동운동에 있어서도「산업별노조주의」는 패퇴해 가기 시작해 총평의 리더들은 산별노조의 건설이라는 직접적 방식을 포기하고 별도의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3-3. 춘투의 정착과 기업별노조의 고착

O  일본 노동운동은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우회적으로 모색하게 되었고, 그 방안의 하나가 바로「춘투」였다. 1955년, 당시의 내셔널센터「총평」은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 방안으로써 [춘투] 방식을 도입했다. 춘투는 쉽게 말해, 임금인상 투쟁을 봄철에 집중하는 "시기집중투쟁", 그 방법으로서는 각 연맹별로 공동투쟁을 하는 "산업별 통일(공동)투쟁" 그리고 미리부터 투쟁 일정을 정해 싸우는 "스케쥴 투쟁" 이 그 핵심적 내용이라 할 수 있다.

O  춘투는 때마침 시작된 일본경제의 고도성장과 맞물리면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 해마다 고액의 임금인상을 쟁취하면서 성과를 올리게 된다. 춘투 전성기인 1955~1975년까지의 평균 임금인상률은 11.8%였고,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임금 인상률도 평균 5.7%를 상회했다.
춘투의 성과, 즉 지속적인 임금인상이 일본 노동자들의 경제적 지위나 생활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춘투의 성과, 투쟁의 결과였다고만 할 수는 없다. 즉 20여년간 계속된 10%가 넘는 임금인상의 획득은 일본 노동운동의 투쟁력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 이라기보다는 고도 경제 성장에 의해 일정 정도 지불능력, 개량의 토대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 자본주의가 춘투라는 방식을 통해 일정 정도 그것을 분배함으로써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향상시키고 소비를 진작시켜 다시 생산을 확대하는 선순환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O  또한 춘투야말로 일본 기업별노조체제를 고착화시킨 주범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춘투 자체가 기업별 지불능력에 따른 개별임금을 전제로 하면서 산업별(연맹별)로 기본급인상액을 정해 함께 싸우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타결 국면에 있어서는 기업별로 타결되기 일쑤였고, 설사 연맹별로  공동교섭, 공동타결을 성공시켰다 하더라도 결국은 기업별로 지불능력의 차이에 의해 임금인상액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춘투가 발전해 갈수록 노동자의 관심은 소속기업의 지불능력 여하에 집중되었고, 일단 파이의 크기를 크게 불리기 위해 생산에 협조하고 분배에 참여한다는 소위「파이의 논리」에 기초한 기업 귀속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반면, 기업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노동자 전체의 계급적 연대를 지향하는 시각은 봉쇄, 차단되었고, 다른 기업의 노동자는 경쟁의 대상, 또는 적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결국 임금인상투쟁 중심의 춘투와 기업별노조 체계는 일본 노동자들의 의식을 철저하게 기업의 울타리 안으로 가둬 놓게 되는 결과를 야기했고 이에 비례해서 기업별노조는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유해 갔으며 반대로 산업별노조는 점점 일본 노동운동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게 되었다.

O  이에 대해 노동조합은 이러한 문제점에 깊이 착목하지 못한 채 춘투를 통한 임금 인상 획득에만 열중한 결과, 외형상 확산되고 발전한 춘투의 겉모습과는 반대로 노동자들의 의식은 점점 더 임금인상에만 집중되고, 이를 위한 기업의존적 경향은 노골화되어 갔다. 춘투에의 참여 역시, 이벤트화, 의무방어전화 되어갔고, 조합에 대한 무관심층의 확대, 현장의 노동조합활동 공동화, 조합민주주의의 형해화는 가속화되어 노동조합의 기반이 서서히 부식되어 갔다.

O  결국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 방안으로 채택된 춘투가 그 외형상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기업귀속의식, 기업의존의식을 강화시키면서 기업별노조를 고착화시키고 산업별노조에의 지향을 잃어버리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약과 결론

1. 기업별노조의 한계

전후 일본노동운동에 있어 기업별노조의 고착화는 패전 직후 미 점령군에 의해 노동조합의 결성이 권장, 육성됨에 따라 급속하게 노동조합을 조직하다보니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인 기업별노조 형태를 취했던 것이 그 발단이 되었고, 이후 목적의식적으로 산별노조를 건설하려 한「산업별노조주의」노선이 주요 투쟁에서 패배함으로써 기업별노조주의가 그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거기에 기업별노조를 극복하는 한 방안으로 채택된 춘투가 오히려 기업별노조체계를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면서 일본 기업별노조 체계는 완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55년부터 시작되어 약 20여 년간에 걸쳐 전성기를 구가한 춘투의 성과는 무시할 수 없다. 고액 임금인상이라는 물질적 성과 외에도 조합원의 참여 확대, 노동운동의 활성화 등 많은 성과를 내면서 일본 노동운동의 독특한 한 전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첫째, 춘투를 통한 고액임금의 획득은 투쟁의 성과라는 측면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나, 보다 본질적으로는 일본 자본주의의 성장에 따른 지불능력의 증대에 기인한 것임을 직시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일본 노동운동이 반증해주고 있다. 즉 지금도 춘투는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지만 최근 5년째 임금 동결 내지는 삭감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임금인상의 획득, 다시 말해 개량의 획득이 반드시 노동운동의 고양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이다. 의식 강화가 수반되지 않는 임금인상이나 개량의 획득이 노동자들을 임금투쟁에 매몰시키면서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이나 의식의 강화에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일본 춘투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제반 요인들에 의해 춘투는 기업별노조체계를 노동조합 조직 체계의 유일무이한 형태로 안착화시키는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일본 노동운동에서「산별노조」는 아예 사어(死語)가 되고 말았다.

기업별노조라고 하는 틀은 노동조합에 속한 노동자들이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이기 이전에 회사원·종업원이라는 신분이 우선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기업이 있어야 노조도 있을 수 있고, 기업이 살아야 노조도 살 수 있다는 자명한 논리 앞에 기업의 경쟁력 향상, 생산성 향상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는 자기모순이 항상적으로 존재한다. 물론 특정한 시기, 즉 운동의 폭발적인 고양기나 혁명적 상황에서는 종업원의식 보다는 노동자의식이 더 우세해지기도 하고, 계급적 의식이나 단결이 비약적으로 고양되기도 하지만 일상적으로는, 또는 운동의 침체기에는 노동자 의식보다는 종업원 의식이 보다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전후 한 때, 일본 노동운동의 고양기 때에는 기업별노조로도, 또 기업별노조의 연합체인 [연맹] 만으로도 전투적?계급적 투쟁이 가능했고, 그 속에서 여러 가지 성과를 낼 수 있었으나, 자본의 공세가 치열해지고 신자유주의가 해일처럼 밀려오면서 기업별노조의 성과로 쌓아올린 공든 탑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아 그것은 결국 사상누각에 불과했음을 보여 주고 말았다. 전후 60여년의 역사를 갖는 일본 노동운동은 기업별노조라는 그릇에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과 변혁적 전망이라는 웅대한 꿈을 담으려 했고, 한 때 가능한 것처럼 비추어지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했던 좌파 노동운동은 주변부로 밀려났고 노사협조주의 우파세력이 일본 노동운동을 평정했다. 노사협조주의 우파의 천하통일, 그 조직적 표현이 현재의 일본 내셔널센터인「연합」이고,「JR서노조」라 할 수 있다.

또한 산업구조의 변화, 고용 형태의 변화라고 하는 노동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같은 기업·사업장내의 정규직노동자들을 그 조직 대상으로 하는 일본의 기업별노조는 급증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울 수 없었음은 물론 노동조합으로 조직화하지도 못했다. 이 점 역시 기업별노조 체계가 갖는 또 다른 중요한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한 때 55.8%에 달하던 일본의 조직율은 현재 19%대까지 떨어져, 전체 노동자들을 대표하지도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립은 확산되었다. 나아가 현재는 영향력의 완전한 상실이라고 하는 고립보다도 더 비참한 상황을 맞고 있다.

물론, 일본 노동운동의 침체와 몰락의 원인을 기업별노조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노동운동의 급격한 추락과 몰락,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무기력의 극치는 기업별노조라고 하는 체질의 문제를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질곡에 빠진 일본 노동운동의 가장 핵심적 병세(病勢)가 노동자 의식의 결여, 계급적 의식의 해체에 있다고 한다면, 그 발병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그런 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체질, 즉 기업별노조라고 하는 체질에서 기인된 점이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기업별노조 하에서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체험하고 있다. 기업별노조라고 하는 틀 속에서도 한국 노동운동은 일본 노동운동의 전성기 때처럼 비록 경제투쟁이라 할지라도 기업별노조의 장점, 즉 강한 현장성과 역동성을 최대한 살려 치열한 투쟁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운동의 침체기, 하강기에서는 기업별노조의 강점보다는 한계가 더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본노동운동의 교훈이다. 물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해일 앞에 유럽의 산별노조 역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산별노조가 만능해결사가 아님은 말 할 필요도 없고, 산별노조가 가지는 약점 또한 적지 않다. 반대로 기업별노조의 장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업별노조라는 열차를 타고 가는 종착역이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은 아니라고 하는 점이다. 그 종착역이 어딘가는 우리보다 먼저 같은 열차를 타고 갔던 일본노동운동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기업별노조 체계 하의 복수노조

더욱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는 일본이 기업별노조 하에서의 복수노조 체제였다고 하는 점이다. 전후 일본 노동운동사는 한마디로 1950년~60년대의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노선과 사상이 노사협조적?실리주의적 노선에 패퇴해 간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전투적 노조를 제압하거나 와해시키는데 결정적인 무기로 기능한 것이 바로 복수노조였다.

그 전형적인 패턴은 1952년「電産」노조의 투쟁,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결이라 불리운 1960년의「미이께(三池)」노조의 282일간 파업 등에서도 볼 수 있듯 거의 예외 없이 "노조의 파업 → 장기화 유도 → 일부조합원 탈퇴, 제2노조 결성 → 이들의 조업 복귀 → 파업의 붕괴 및 패배 → 제2노조의 득세 → 노조의 세력 역전(제2노조가 제1노조로)" 이라고 하는 수순을 밟아 진행되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일본 노동운동이 노사협조주의 노선으로의 우익재편이 완료되자, 아이러니하게도 복수노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일부 공공부문 노조에서 정당의 영향, 정치노선의 영향 등으로 인해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JR 서일본에서처럼 일부 민주파노조가 소수파로써 존재는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복수노조 체제를 이용한 전투적노조의 와해"라고 하는 빚을 "복수노조를 이용한 어용노조의 타도"로 갚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복수노조 체제는 다수파가 되면 되는대로 소수파가 되면 또 소수파가 되는대로 전투적, 계급적 노선의 좌파 노동조합, 노동운동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 일본 노동운동의 또 다른 뼈아픈 교훈이다.

3. 결론

2007년 복수노조 시대를 앞두고 있는 우리의 선택은 자명하다. 복수노조라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인가 혹은 불리하게 작용할 것인가 하는 편의주의적 판단을 넘어, "노동자의 기본적인 단결권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허용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변화된 지형 속에서 예상되는 기업별노조체계 하에서의 복수노조의 문제점과 폐해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그 방법은「산별노조 건설」이라는 길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다. 현재 6,000여개로 나뉘어져 있는 기업별노조가 또 다시 이 파 저 파, 대파 쪽파로 4분5열 되면서 저마다 노동조합의 깃발을 하나씩 내건다고 한다면. 그 때의 한국 노동운동이 과연 지금정도의 힘이라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일본의 전철을 밟지는 않을 것인가, 기업별노조와 복수노조가 "지옥으로 가는 KTX 승차권"이 되지는 않을 것인가, 냉정하게 판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보다 2~30년 앞서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를 경험한 바 있는 일본 노동운동이 하지 않은, 또는 초기에 해 보려고 하다 실패하고 난 후 아예 잊어버리고 만 유일한 테제가 있다면, 그것은「산별노조의 건설」이다. 일본 노동운동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과 영감(靈感)은 바로 이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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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참고자료] 지역노조의 역할과 과제를 탐색한다(토키타 요시히사) 서울본부 2005.11.22 46
32 히로사와 동지에게서 온 편지입니다. 서울본부 2005.11.21 46
31 [참고자료] 일본의 기업주의적 노사관계의 형성과정에 대한 검토 서울본부 2005.11.20 49
30 [참고자료] 일본노동운동(이원우) file 서울본부 2005.11.20 46
29 [참고자료] 일본 노동자교육의 역사적 전개와 교육투쟁 서울본부 2005.11.20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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