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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kilsp.jinbo.net/publish/97/9707-16.htm

일본의 기업주의적 노사관계의 형성과정에 대한 검토
                                          이 호 창 / 연세대 강사·사회학                  

  일본의 노사관계는 한마디로 '기업주의적' 노사관계로 규정할 수 있다. '기업주의적' 노사관계는 노사관계의 '기업내화(內化)' 속에서 기업의 안정과 성장을 중심축으로 노사가 긴밀히 결합(융합?)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서구 노조의 경우, 기업의 성장과 노동자의 근로조건 향상이 관련이 있다고 보지만 두 가지를 상호독립적인 별개의 과제로 파악한다. 따라서 서구의 노조는 기업의 성장과 별도의 차원에서 노동자의 근로조건 향상을 추구한다. 반면 일본의 노조는 기업의 안정과 성장을 통해서만 노동자의 근로조건이 향상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없으면 노동자도 없다"는 의식이 매우 강하다. 따라서 기업의 안정과 성장이 근로조건 향상의 필수전제로서 우선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일본의 기업주의적 노사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기업주의적 노사관계의 형성을 설명하는 논의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 즉 발달된 내부노동시장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노동시장론적 방법, 전통적인 사회문화적 조건과 연관지워 설명하는 문화론적 방법, 노사의 세력관계와 전략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이해하는 노사관계론적 방법이 있다. 전통적 문화나 내부노동시장이 기업주의적 노사관계의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결국 노사관계도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계가 그렇듯이 구성원(노사)의 행위의 산물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기업주의적 노사관계 역시 노사의 전략적 선택과 행위의 결과로 설명하는 노사관계론적 방법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하에서는 전후 일본의 노사관계를 세 단계로 구분해 노사관계 변화의 추이와 각 시기의 노사의 전략적 선택과 행위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대립적 관계(전후∼1950년대)  
  2차대전 패전 이후 1950년대까지 일본기업의 노사관계는 한마디로 생산현장(직장)의 권력을 둘러싼 노사간의 격돌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노사 양측은 대립적 관계 속에서 생산현장의 주도권(initiative)을 누가 장악하는가 하는 문제로 갈등해 왔다.  
  <중략>
  1950년 3월 "자유롭고 민주적인 노조"라는 기치아래 만들어진 총평은, 애초 공산당의 프락치 활동을 통한 조합지배에 대한 반발을 계기로 발족한 민주화동맹(민동)의 결집체로 무엇보다 공산당계열 노동운동의 배제를 염두에 두고 결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1951년의 제2회대회를 계기로 총평내의 좌파세력이 부상하며 국제자유노련(ICFTU)으로의 일괄가맹안을 폐기하고 '평화4원칙'(전면강화, 중립견지, 군사기지반대, 재군비반대)을 정치방침으로 결정하는 등의 총평의 급격한 노선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 대회에서 선출된 민동 좌파출신의 다카노(高野實) 집행부는 다시 계급적이고 전투적인 기풍의 노동운동을 활성화시키고자 했다. 한편 개별사업장에서도 경영자주도의 직장질서 재편움직임에 대한 현장노동자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직장노동운동이 다시 강화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변화 속에서 생산현장을 둘러싼 노사간의 공방전이 본격적으로 재연되기 시작했다. 직장을 확실히 경영자 주도로 재편하려는 경영측과 직장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이해를 확보하려는 노동자들 사이에 치열한 갈등과 격돌이 일어났다. 1950년대 초반 직장을 둘러싼 노사간의 갈등과 격돌은 노조측의 '통일노동협약체결투쟁'과 일경련의 '노동협약기준안'으로 대표되는 경영측의 공격적 반응 속에서 잘 나타난다.
  노조측이 1952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한 통일노동협약체결투쟁은 노동자의 공동투쟁과 성과를 통해 산업별 수준에서 노동자의 단결을 높인다는 계획뿐 아니라, 직장에서의 노동내용과 근로조건의 협정화를 통해 생산현장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력을 제고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당시 여러 산업별 조합이 제시한 노동협약기준안의 공통목표였던 ① 인사권에 대한 동의약관, 협의약관의 확보 ② 조합활동, 정치활동의 자유 ③ 완전한 유니온숍 ④ 조합원 범위의 확대 ⑤ 상부단체교섭권의 확립 ⑥ 경영협의회에 의한 경영참가의 강화 ⑦ 평화조항, 쟁의제한조항의 철폐 등을 보더라도 협약투쟁의 의미와 목적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당연히 이런 노조의 통일노동협약체결투쟁은 직장에서 경영권을 확실하게 정립하려는 경영측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53년 1월 발표된 일경련의 노동협약기준안은 협약투쟁을 전개하는 노조에 대한 경영측의 매우 공격적인 반응이었다. 일경련은 협약투쟁과 같은 무리한 주장이 제기되는 상황에서는 노사간의 협상과 타결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주장하며 "차라리 노동협약을 백지환원하여 취업규칙의 정비와 임금협정부터 다시 정리하는 것"이 낫겠다는 초강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아울러 노동협약의 체결에 있어 경영자의 새로운 인식과 결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노조의 협약투쟁에 대해 경영측이 연대해 대항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면에서도 경영권에 대한 단호한 태도와 노조에 대한 공격적인 입장이 두드러진다.
  노사관계의 재편과 직장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영자와 노조측의 팽팽한 대립은 곧 노사간의 격렬한 충돌과 격돌로 이어졌다. 1950년대 동안 탄로  전산쟁의(1952),닛산쟁의(1953),아마가사키(尼崎)쟁의(1954),무로랑(室蘭)쟁의(1954),국철니이카타쟁의(1957),철강노련파업투쟁(1957, 59), 미이케쟁의(1960) 등의 노사간의 대격돌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가와니시의 유형분류에 따르면, 이들 쟁의가 기본적으로 대개 '경영자반공형(反攻型)'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경영측의 승리로 끝났다는 점이다. 경영자들은 노조의 직장조직과 통제력이 강했던 사업장에 대해 역으로 강력한 공세를 가해 경영자의 주도권을 회복했다.
  1950년대 생산현장을 둘러싼 공방전에서 노사 양측은 어떤 전술을 사용했을까? 먼저 총평 다카노 집행부 시절, 노조가 채택한 방법은 이른바 '총력투쟁'(ぐるみ鬪爭)전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직장내 대중투쟁에 기초한 선진적인 싸움이 산업별 공동투쟁의 와해에 의해 고립되는 상황이 반복되자 그 곤란을 가족과 지역의 공동투쟁의 힘으로 타개하고자 하는 전술이었다. 1953년의 제4회 총평대회에서는 노동자 주변에 가족  농민  시민을 결합한 '파업단의 대중화'를 추구할 것을 제기했고, 54년의 대회에서는 직장투쟁을 기점으로 한 대중투쟁의 구축과 함께, 주부의 조직화를 통한 가족총력투쟁, 실업자  상인  중소기업자 등의 지역공동투쟁의 조직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 총력투쟁은 부분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경영측의 전면적인 공세 하에서 고립과 패배를 모면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직장과 지역중심의 총력투쟁으로는 결코 경영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지켜 내기 위해서는 산업별 통일투쟁에 기초한 '총자본 대 총노동'의 투쟁을 조직하는 것 이외의 유효한 대안이 있을 수 없다는 견해가 강력히 제기되었고, 임금의 산업별 공동투쟁인 춘계임금투쟁(춘투)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1955년 다카노 라인에서 오타(太田薰)  이와이(岩井章) 라인으로의 전환으로 묘사되는 지도부의 교체와 함께 총평은 그때까지의 직장투쟁중심의 싸움을 산업별 투쟁중심으로 이동시켜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투쟁을 강조하며 직장투쟁의 활성화를 산업별 투쟁의 핵심적 기초로 보는 생각은 강하게 견지되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총평운동은 새롭게 구상된 춘투방식과 이미 하부에 형성되어 있는 직장투쟁방식이 양축을 이루고 전개되었다.
  이러한 1950년대의 총평의 직장투쟁관을 이론적으로 집대성한 것이 1958년 발표된 {총평조직강령초안}이다. 여기서는 노사간의 대립이 직장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는 점과, 착취형태가 생산지점에서 노동자에게 체감되고 노동자의 역량도 여기에서 축적되어 발휘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기존의 직장투쟁의 의미를 높게 평가하고 이를 노동자의 대중투쟁으로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도모한다. 그리고 직장투쟁을 기초로 한 통일투쟁의 발전을 통해 기업별 조합으로부터의 탈피를 구상한다. 더 나아가 직장투쟁을 노동자를 직장의 주인공으로 하여 "계급해방의 주체적인 하부구조"를 건설하는 것으로까지 적극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노조측이 1950년대 전반부에는 주로 직장투쟁과 총력투쟁의 결합을 통해, 그리고 후반부에는 춘투와 직장투쟁의 조합을 통해 직장을 둘러싼 공방전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통제를 확보하려고 했던데 반해, 경영측은 직장투쟁의 고립화와 주로 직제층의 이반을 통한 노조의 분열을 통해 전투적 노조를 분쇄시키고 경영자주도의 직장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1950년대 노사간의 대표적인 격돌이었다고 할수 있는 닛산(日産)쟁의 사례를 통해 직장투쟁에 대한 경영측의 대응과 공격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중략>
  닛산쟁의의 모습은 1950년대 직장을 둘러싼 노사간의 격돌과 그 해결의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회사의 노조에 대한 공격, 반공 → 노사의 격렬한 충돌 → 쟁의의 장기화 → 연대투쟁의 붕괴, 직장투쟁의 고립화 → 직제층의 이반 → 조합분열, 제 2조합의 결성 → 회사의 제 2조합에 대한 지원
→ 회사와 제 2조합간의 협상해결, 제 1조합의 고립 → 제 1조합의 붕괴 내지 소수파로의 전락, 다수
파 제 2조합 → 경영권의 확립, 협력적 노사관계의 정착'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직장에서
전투적 조합은 붕괴하고 경영권이 분명히 확립되었다. 경영자들은 "직장질서가 기업경영의 가장 중요
한 생명선"(일경련,{직장투쟁과 그 대책}, 1955)이라는 입장 아래 직장에서 노조와 적극적으로 맞섰
고, 직장투쟁의 고립화와 직제층의 이반에 의한 노조분열을 통해 전투적 노조의 분쇄와 경영자주도적 직장질서 구축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직장투쟁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통한 전투적 노조의 분쇄와 더불어, 1950년대 중반부터 경영측은 기계화, 설비합리화를 통한 대량생산체제의 구축과 본격적인 노무관리체계의 확립을 도모했다. 기계화, 설비합리화에 따른 중견숙련노동자 중심의 노동자집단의 해체와 근대적 노무관리체계의 구축에 따른 직장통제질서의 확립은 생산현장에서의 노사의 공방전을 종식시키며 경영자의 주도권을 공고히 했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에 걸쳐 이루어졌던 노무관리체계의 확립을 통한 경영측의 직장질서 재편의 움직임은 단지 기술혁신의 진행에 따른 노동의 변용에 대한 기술적 대응만이 아니라 "노조와 직장위원회에 대항해서 직장을 관리하는 권력을 구축하고자 하는 정치적 전략"이기도 했다.
  전후 1950년대까지 일본의 노사는 대립적 관계 속에서 특히 생산현장의 권력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격돌해 왔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직장투쟁에서의 경영측의 거듭된 승리와 노조의 성격변화, 경영자주도의 직장질서 형성 속에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 미쓰이  미이케(三井  三池)쟁의에서의 노동측의 패배는 기존의 직장투쟁에 대한 노조측의 반성과 재검토로 이어졌고, 민간기업에서 전투적 노조를 대신하며 등장한 협력적 노조들은 전투적, 계급적인 총평과 다른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60년 미이케쟁의의 패배를 계기로 이루어진 총평의 노선변화와 1964년 설립된 동맹(전일본노동총동맹)과 IMF-JC(국제금속노련일본협의회)의 등장은 일본 노동운동과 노사관계의 새로운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다.
  먼저 총평은 미이케 패배를 계기로 기존의 직장투쟁노선을 대폭 수정, 약화시키면서 춘투체제를 발전, 정착시켜 나갔다. 총평은 기존의 투쟁이 과도하게 직장투쟁일변도로 흘렀다고 비판하면서, 직장투쟁의 의미를 축소, 조정했다. 현장조직의 자주성과 대중의 에너지를 중시하던 직장투쟁과는 달리 노조의 통일기능 속에 직장투쟁을 종속시키고 상층단위의 사전조정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총평의 노선전환은 앞서 보았던 1958년의 {총평조직강령초안}이 결국 채택되지 못한 채 1962년 {조직방침(안)}으로 바뀌게 되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양자를 비교해 보면 직장투쟁에 대한 총평의 입장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조직방침(안)}에서는 보다 넓은 지형에서의 문제해결 노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직장투쟁을 산업별 통일투쟁에 복속시킨다. 직장으로의 3권위양을 조합운동의 원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보며, 직장에서의 조합활동을 단지 직장의 요구를 폭넓게 수렴해 상부로 연결해 주는 실무적 역할(世話役) 정도로 축소, 한정하고 있다. {조직방침(안)}에서 '직장투쟁'이 '직장활동'이란 용어로 바뀐 사실은 직장투쟁의 위상과 의미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민간대기업에서도 계급적, 전투적인 노동운동 세력들이 쇠퇴하며, 실리와 합리성을 내세운 노사협력적인 인사들이 노조의 지도부를 장악해 갔다. 이들은 자기들 중심의 새로운 연대를 구축하며 기존의 총평과 다른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64년 금속산업 대기업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IMF-JC나 새로운 전국중앙을 지향하며 만들어진 동맹은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노동조합주의를 주창하며 노동운동의 새로운 재편을 가속화시켜 나갔다.
  전후 지속되었던 생산현장의 권력을 둘러싼 노사간의 격돌은 이러한 일련의 변화 속에서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일본적 노사관계의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생산현장에서의 노사의 대립적 관계가 종식되고 협력적 관계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2. 협력적 관계(1960년대 초반∼1970년대 초반)  
  생산현장의 권력을 둘러싼 노사간의 격돌이 종식된 이후, 일본의 노사관계는 생산영역에서의 경영권의 적극적 발휘와 분배영역에서의 노사간의 이해의 조정이라는 안정적이고 제도화된 형태로 변모했다.
개별기업에서는 노사협력적인 세력들이 노조의 헤게모니를 잡으며 기업의 생산성향상과 합리화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인 총평은 이 시기에도 원칙적으로는 경영자에 대해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이미 운동축은 직장투쟁과 같은 생산투쟁으로부터 임금투쟁과 같은 분배투쟁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또한 기업차원에서의 노사관계의 변화를 반영해 동맹이나 IMF-JC와 같은 노사협력적인 세력들이 점차 총평의 힘을 압도하며 - 특히 민간부문에서는 - 노조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전후부터 1950년대를 풍미한 것이 직장투쟁이었다면, 고도성장기의 중심인 1960년대와 1970년대 전반을 지배했던 노동운동은 '춘계임금투쟁'(춘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춘투의 효시는 1955년 봄, 8개의 산별이 공동투쟁체제를 갖춰 처음으로 산업별 공동임금인상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같은 해 총평대회에서 지도부의 교체가 이루어지고, 새롭게 구축된 오타  이와이(太田  岩井) 라인은 춘투를 본격적으로 산업별 공동투쟁에 기초한 임금투쟁방식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후 춘투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외연적 확대를 거듭해 고도성장기의 대표적인 운동방식이 되었다.
  춘투가 거둔 성과로서는 우선 임금을 급상승시켜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개선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춘투체제하 임금상승률을 보면, 실질임금기준으로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연 4% 정도의 꾸준한 상승을 보였고, 1965년부터 고도성장이 끝나는 1973년까지는 10% 남짓의 수직적 상승을 기록했다.
이러한 고속의 임금상승은 노동자의 생활상태를 개선시켰고 본격적인 대중소비시대의 막을 열었다.
  둘째, 춘투는 임금상승과 함께 임금격차를 축소시켰다. 산업별, 연령별, 학력별, 성별, 직종별로 존
재했던 상당 수준의 임금격차는 춘투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축소되어 갔다.
  셋째, 춘투는 많은 노동자들을 동일시기에 동일과제로 집결시켜 내는데 성공함으로써 산업별 통일투쟁의 측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산업별 통일투쟁의 추진은 일본 노조운동의 조직적 걸림돌이었던 기업별 조합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과적으로 춘투를 통한 산업별 통일투쟁이 기업별 조합주의를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그것의 극복을 위한 적극적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기본적으로 '약자의 연대'라는 수세적 입장에서 출발한 춘투가 이러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고도성장과 노동시장의 변화 - 수요자시장에서 공급자시장으로 - 라는 맥락적 요인도 작용하고 있지만, 주체의 효과적인 전술구사와 운동방식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춘투참가노조들이 일정을 맞춰 교섭과 투쟁을 전개하고, 거점단산을 중심으로 공격한 뒤 그 성과를 춘투획득인상율(春鬪相場)로 삼아 다른 단산이 공유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스케쥴투쟁  중핵선행방식) 힘의 집중 및 효율적 안배를 이룰 수 있었고, 그 결과 노동자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효과적으로 제고해 기업측에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춘투의 성과 뒤에는 직장에서의 노동운동의 공동화와 생산영역에서의 경영자의 지배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와 견제권의 상실이 수반되고 있었다. 경영자는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 주는 대신에 직장에서 강력한 주도권을 장악하고 생산성향상과 합리화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다. 춘투와 동시에 기업측은 본격적인 생산성향상운동을 개시하고 있었고, "춘투의 정착과정은 곧 생산성향상운동의 정착과정"이라고 할만큼 춘투라는 노동자분배투쟁의 저편에는 경영자주도의 생산성향상운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생산성 향상운동이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지원 하에서 1955년 일본생산성본부가 만들어지면서부터다. 생산성본부는 "생산성 향상이라는 공통의 과제에서 노사 쌍방이 국민경제의 관점에서 대국적으로 협력할 것을 촉구하며" 생산성 향상을 범국민운동으로 전개하고자 했다.
경영측이 당연히 생산성 향상운동을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나선 데 반해 노동계의 입장은 양분되었다.
  당시 총동맹(일본노동조합총동맹)이나 전노(전일본노동조합회의)가 '찬성-협력적'인 의사를 표명한데 반해 총평은 '반대-비협력'의 입장을 취했다. 총동맹의 경우에는 생산성향상운동을 "일본경제의 자립과 국민생활의 향상을 지향하는 종합적 시책에 관류하는 운동"으로 보며 초동단계부터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반면 총평은 "생산성향상운동을 직장으로부터 초과이윤을 탐내고, 노동강화  임금인하  해고를 강행하고, 노동운동을 탄압해 그 산업보국회화를 노려 노동운동에 분열의 쐐기를 박으려는" 움직임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총평의 운동방침은 다분히 총론적, 이데올로기적 수준에 머문 거부였고 당시 성장하고 있는 민간기업에서의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 약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개별기업 단위로 내려가면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958년 발표된 생산성본부의 조사에 따르면, 총평의 "운동방침은 단위조합에서는 거의 공문화되고, 실제로는 대부분이 생산성운동의 방향으로 노사협력체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생산성향상운동은 더욱 본격적인 양태로 전개되었고 노조 내에서도 생산성향상에 대한 보다 능동적인 관심과 평가가 나타나게 되었다. 생산성향상을 위한 노조운동조직으로 만들어진 전국노동조합생산성기획실천위원회(1959)와 그것을 조직적으로 개편  강화한 전국노동조합생산성회의(1968)에는 동맹회의(→ 동맹), IMF-JC계열의 많은 단산(單産)들이 중추적으로 참가했고 그와 함께 노조의 생산성향상을 위한 적극적인 행보가 이루어졌다.
  일본의 노사관계의 전환 속에서 창립된 동맹이나 IMF-JC는 총평과 달리 처음부터 생산성향상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협력했다. 이들은 생산성향상을 국민경제 전체의 발전과 노동자의 생활향상을 위한 관건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임금인상을 생산성향상의 성과배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동맹이나 IMF-JC의 운동기조 선상에는 생산성향상을 통해 파이의 크기를 키우지 않고는 노동자의 분배분도 증가시킬 수 없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생산협력-분배대립"이라는 동맹의 운동방침이나 "기업번영을 통한 노동자의 생활향상"이라는 IMF-JC의 노동조합주의는 생산성향상과 근로조건향상 문제를 바라보는 협력적 노동운동 세력들의 생각을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총평은 동맹이나 IMF-JC와는 달리 총론적, 원칙적 차원에서는 생산성향상과 합리화운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구체적 대안마련에서는 여전히 무력했다. 더욱이 1960년 안보  미이케투쟁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노선전환이 이루어진 뒤에는 운동의 초점이 거의 일방적으로 춘투로 이동한 결과, 직장과 생산영역에서의 투쟁은 상대적으로 공백상태에 빠져들었다. 춘투일변도의 총평운동은 "노조를 직장으로부터 후퇴시키고, 직장투쟁 자체를 방기하여 임금투쟁과 합리화 반대투쟁의 고리를 절단하고 말았다. 총평운동은 임금투쟁을 중심으로 한 간부투쟁으로 경사 되어 갔다". 1960년대 총평의 운동은 점점 "춘투만이 비대화하며 운동의 '질'로 연결되지 않는 '양'의 투쟁, '기업내 임금인상투쟁'으로 시종해 갔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생산성향상운동에 대한 원론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용적 측면에서 총평이 생산성향상과 합리화를 위한 경영자의 지배와 주도에 실질적인 반대나 견제를 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한편 개별기업에서는 노사협력적인 세력들이 다수파를 형성하며 많은 노조의 집행부를 장악해 갔다.
1950년대 후반 직장투쟁의 패배와 적극적인 노무관리의 전개를 계기로 본격화된 협력적 세력으로의 노조지도부 교체는 196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전투적 세력은 소수화 되었고 직장활동가들은 고립되었다. 1967년 민간부문에서 동맹의 조직율이 총평을 상회하기 시작한 것은 기업별 노조내부의 세력관계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동맹은 새롭게 교체된 협력적인 노조를 산하에 흡수하면서 급속한 조직의 성장을 거둘 수 있었다. 협력적인 기업별 노조는 이전의 직장투쟁을 투쟁지상적이고 소모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경영자의 생산성향상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노사관계의 커다란 전환 속에서 일본기업들은 생산성향상과 합리화운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해 나갈 수 있었고, 1960년대 중반부터는 일본적 능력주의관리를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능력주의관리는 다시 생산현장에 대한 경영자의 주도권과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통합력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노사관계의 변화와 노무관리의 발전은 상호 상승효과를 발휘하며 일본적 생산  노동방식을 구축해 나갔다.
  고도성장기 춘투중심의 노사관계 속에서 높은 수준의 임금인상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기업은 노조의 협력을 통해 높은 생산성향상과 고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고율의 임금상승이 별로 부담이 되지 않았다. 실질임금상승이 생산성향상이라는 확실한 물적 기반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고임금과 고이윤은 충분히 양립가능한 것이었다. 오히려 임금수준의 상승이 구매력 향상으로 연결됨으로 인해 대량생산이 대량소비로 실현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경영자의 입장에서 볼 때, 춘투중심 노사관계 하에서의 높은 임금인상은 직장에서의 경영자의 확실한 주도권에 대한 대가 또는 생산성향상을 위한 노조의 협력에 대한 보상으로 지출하는 '가치 있는 비용'(valuable cost)이었다.
  춘투와 생산성향상이라는 두 바퀴가 고도성장기의 궤도를 달리면서 노동자의 상태와 의식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급속한 임금상승 속에서 노동자의 구매력이 향상되며 본격적인 대중소비시대의 막이 올랐다. 1950년대 후반 3종의 신기(흑백TV, 냉장고, 세탁기)로 시작된 대중소비의 붐은 1960년대 중반 이후 3C(color TV, cooler, car)의 폭발적 수요로 이어졌다. 생활상태의 변화와 함께 노동자들 속에 자신의 생활만을 추구하며 향유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노동자의 '사생활형 합리주의'는 당연히 기업과 노조 양편 모두로부터 노동자의 귀속의식 약화와 이반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경영자들은 사생활형 합리주의의 침투에 의한 기업귀속의식의 약화에 대한 대응책으로 QC활동과 같은 소집단활동을 통해 집단의식과 기업귀속의식을 제고시켜 나갔다. 그러나 노조들은 사생활형 합리주의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 기류에 편승해 나갔다. 이미 운동노선의 변화 속에서 직장내 노동운동이 소극화, 약화된 상황에서 사생활형 합리주의로 표상 되는 노동자들의 노조에 대한 관심의 저하는 직장내 노동운동의 공백을 변명하는 구실이 되었다. 사생활형 합리주의에 대한 기업과 노조의 대응방식 차이는 경영자의 직장지배와 주도를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결국 춘투와 생산성향상운동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노사관계는 대립적 관계 속에서 생산현장의 권력을 둘러싸고 노사간의 격돌이 일어났던 이전시기와 달리, 경영자의 확실한 주도 속에 직장에서 노사간의 협력이 발전해 나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생산현장은 노사간의 길항의 공간이 아니라 경영자의 권력이 거의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장소로 변해 갔다. 비록 이 시기에도 춘투를 매개로 노사간의 힘겨룸은 계속 일어나고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분배영역에 국한된 것이었고 생산영역에서는 경영자주도의 노사협력이 확립되어 갔다. 이 점에서 춘투는 일본 노동운동으로 볼 때는 임금상승을 대가로 생산에서의 경영자의 전권을 전면적으로 인정한 또 다른 '파우스트의 협상'이었을 지도 모른다.  

   3. 융합적 관계(1970년대 중반 이후)  
  1960년대 전반을 분기로 노사관계가 대립적 관계에서 협력적 관계로 전환된 이후, 협력적 세력들의 영향력이 더욱 증대하며 노동운동의 기업주의적 색채가 강해졌다. 각 기업에서는 생산현장의 주도권을 확보한 경영자들이 본격적인 일본적 노무관리의 구축을 통해 기업에 대한 노동자의 충성과 헌신을 제고시켰다. 경영자의 적극적인 노무관리 속에서 이미 상당히 약체화되어 있던 조합의 직장조직은 완전히 공동화되어 버렸고 노사가 긴밀히 결합된 융합적 노사관계가 형성되어 갔다. 전국수준에서는 경영자와 대립적인 총평과 협력적인 IMF-JC와 동맹이 전체 노동운동을 양분하고 있었지만, 경향적으로는 이미 IMF-JC나 동맹이 총평을 압도해 가고 있었다.
  직장투쟁의 소멸이 대립적 관계에서 협력적 관계로 전환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면, 춘투의 성격변화는 협력적 관계에서 융합적 관계로 진전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협력적 관계에서는 경영의 주도권이 생산영역에서 확실히 발휘되며, 노사간의 대립지점이 생산에서 분배영역으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융합적 관계에서는 생산영역에서는 물론 분배영역에서도 기업의 안정과 성장을 우선시 하는 기업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면 협력적 관계에서 융합적 관계로의 전환점이 되는 춘투의 성격변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춘투는 19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민간중화학공업 단위산별노조(단산)주도형'으로 변화했다. 춘투 초기에는 공노협, 사철(私鐵), 석탄, 철강 등의 여러 단산들이 번갈아 가며 1번타자 역할을 해 왔지만, 1960년대 중반 '민간중화학공업 단산주도형'으로 변화된 이후에는 철강노련을 필두로 한 민간중화학공업 단산들이 춘투선도역(pattern setter)을 맡게 되었다. 민간중화학공업 단산들은 한편으로 총평, 중립노련, 동맹에 소속해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독자적 연합체인
IMF-JC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에 걸쳐 이루어진 대기업 노
조지도부의 교체와 관련해 협력적 색채를 강화해 가고 있었다. 총평은 노조운동의 정통성과 춘투의 조직자라는 권위를 이용해 민간중화학공업 단산들을 총평주도의 춘투에 묶어 두려고 했지만,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이들의 이반은 두드러졌다. 1970년대 들어와 "본적 총평, 현주소 JC"라는 말이 상징하듯 IMF-JC를 중심으로 한 민간중화학공업 단산들의 독자적 행보 경향이 더욱 강해졌고, 각 단산에 노사협력노선이 확산되면서 JC춘투의 영향력도 급속히 확대되었다.
  고도성장과 춘투 속에서 매년 높은 임금상승이 이루어지던 가운데, 일경련은 1970년대를 겨냥해 발간한 {임금백서}를 통해 임금결정의 원리로 생산성기준을 제시했다. 이것은 임금상승을 실질생산성향상과 기업의 지불능력 범위내로 한정함으로써 춘투방식의 확대에 따른 높은 임금상승을 억제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여기서는 국민경제적 차원의 임금결정의 중요성을 제기함으로써 노사관계를 '국익우선'이라는 이념 속에 복속시키려 하고 있다.
  일경련의 '생산성기준', '국익우선'의 임금결정 주장은 초기에는 춘투의 거센 파고 앞에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석유위기를 계기로 시작된 경제환경의 악화 속에서 경영측은 기존의 춘투체제와 높은 임금상승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자세를 보였고, 기업주의화한 노동운동 세력들은 경제정합성 논리를 내세우며 경영측과 보조를 맞춰 갔다.
  석유위기 직후인 1974년 춘투에서 32.9%라는 사상 최고의 임금상승률을 기록하자, 경영측은 비용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국민경제의 불안과 기업경쟁력의 약화 등을 이유로 적극적인 임금인상억제정책을 취하였다. 일경련은 1974년 춘투에서 임금에 관한 경영자단체의 결의가 개별기업의 이기적 행동에 의해 지켜지지 않은 것과 관련해 개별기업의 무원칙적인 임금인상에 대해 경고하는 동시에 대폭임금인상행방연구위원회란 것을 조직해 본격적인 임금억제방안 마련에 나섰다. 이 연구위원회는 일경련의 가이드 포스트로 발표된 보고서에서 "과도한 임금인상이 계속되면 일본의 국제경쟁력이 크게 저하"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국민적 합의로 "자숙내핍하는 결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경영측의 주장에 대해 IMF-JC의 주축이며 춘투상장의 핵심단산이었던 철강노련의 지도부가 가장 먼저 호응했다. 1974년 8월의 철강노련 정기대회에서 미야타(宮田義二)위원장(당시 IMF-JC 의장을 겸임)은 전년실적 플러스 알파식의 임금인상요구를 경제성장과 조화된 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곧 다음해 철강노련과 IMF-JC의 춘투방침에서부터 위력을 발휘했다.
  동맹 역시 1975년 운동방침에서 국민적 입장에 서서 인플레이션의 조기억제를 고려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이 노조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동맹대회에서 아마이케(天池淸次)회장은 이런 입장을 '사회계약적 방법'으로 자리 매김하며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임금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임금자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IMF-JC와 동맹의 이러한 논의는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임금인상요구를 국민경제와 기업상황에 따라 자제하겠다는 '경제정합성=임금인상자숙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 맞서 총평과 춘투공투는 "소위 임금인상자숙론으로는 임금인상도 인플레이션대책도 성공할 수 없다"고 비판하며 30% 이상의 고율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노동운동에서의 세력판도는 변화해 있었다. 1975년 춘투에서 춘투공투는 공노협과 민간단산간의 조정실패를 계기로 양분되면서 지도력이 급격히 저하된 반면, JC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독자적 공투체제를 구축해 '스크럼트라이'라고 불리는 철강, 조선중기의 동시매듭(同時決着)방식을 통해 춘투를 주도했다. 마침내 'JC춘투'가 '총평춘투'를 대신해 춘투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후 춘투는 실질적으로 JC의 4단산(철강, 조선중기, 자동차, 전기) 집중결전방식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경제정합성론을 비판했던 총평 역시 결국 이 변화를 수용, 추수하게 되었다.
  경제환경의 변화, 경영측의 임금인상에 대한 단호한 태도, 춘투주체의 변화와 기업주의화한 노동운동의 임금인상자숙론 속에서 1975년의 임금인상률은 애초 일경련의 대폭임금인상행방연구위원회가 설정했던 가이드 라인인 15%를 하회하는 13.1%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후 1976년부터는 춘투임금인상률(명목)이 10%를 크게 밑돌게 되었고, 제조업 실질임금인상률도 1987년까지 대개 2% 이하의 낮은 수준을 보이게 되었다. 실제로 이 수치는 같은 기간동안의 취업자1인당 실질GNP상승률(3-4%)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극적인 임금동향의 변화는 서구에서는 사실상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분배영역에서의 일본 노사관계의 새로운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춘투의 성격이 변화하면서 파업과 같은 단체행동은 춘투에서 사라져 버렸다. 상층교섭에 의한 一發回答이 일반화되며 "파업없는 춘투"가 되었고, "춘투는 춘담으로"(春鬪から春談へ) 변화해 갔다. 1970년대 중반까지 일본은 선진국 가운데 노동쟁의가 중상위권에 속한 국가였으나 이후 선진국중 파업이 없는 대표적인 나라가 되었다. 이처럼 춘투에서 파업이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은 새로운 JC춘투 주도세력들이 파업을 "기업이나 노동자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소모적인 행위"로 보며 상층교섭과 대화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춘투를 둘러싼 일련의 변화는 바로 일본의 노사관계가 협력적 관계에서 융합적 관계로 진전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일본의 노조는 기업의 안정과 성장을 위해서라면 분배영역에서도 노동자의 요구와 투쟁을 자제하고 부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고도성장기의 일본의 협력적 노동운동세력들의 "생산협력-분배대립"이라는 주장은 생산과 분배 전 영역에서 기업의 안정과 성장을 우선으로 한 기업주의적 협력으로 변모해 갔다.
  춘투의 성격변화와 함께 기업의 합리화조치에 대한 노조의 수용적  협력적 태도 역시 일본의 노사관계가 융합적 관계로 변모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준다. 인원조정을 동반한 합리화는 고용관계 자체에 직접 메스를 대는 것이기 때문에 통상 노조의 격렬한 저항과 반대투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1970년대 석유위기를 계기로 본격화된 기업의 합리화조치에 대해서 노조는 기업의 안정과 성장을 위해서는 합리화가 불가피하며(합리화불가피론), 합리화는 기업의 번영을 낳고 기업의 번영이 노동자의 생활향상을 가능하게 한다는 입장(합리화이득론) 아래 수용적이고 협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1970년대 중반 이후 상당한 인원정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전반의 합리화과정에서 발생했었던 것과 같은 격렬한 노사충돌이 별로 없었던 것은 노사관계의 변화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 기업측의 인원합리화에 대한 노조협력의 일례를 스미토모중기(住友重機)의 사례를 통해 보도록 하자.
  스미토모중기(종업원 12,409명)는 1977∼9년에 걸쳐 3,878명(삭감율 31.3%)의 대규모 인원정리를 단행했다. 이때 회사측은 고령자, 병약자, 기혼여성, 직장활동가 등을 우선적으로 해고하기 위해 '용퇴기준'을 작성했다. 더욱이 소수파 제 1조합(총평계)의 17명에 대해서는 지명해고를 했다. 이런 경영측의 조치에 대해 다수파 제 2조합(동맹계)은 전면적으로 협력했다. '용퇴기준'에 해당되면서도 퇴직을 거부한 채 계속 취로하고 있던 54명의 노동자에 대해서는 직제와 제 2조합원이 연일 포위한 채 조기퇴직을 강요했다. 당시 조합은 인원합리화에 대한 협력의 이유를 "대다수의 조합원과 그 가족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는 생활기반인 스미토모중기의 재건이 절대로 필요하고, 고용조정 없이는 스미토모중기의 재(再)부상도 없다"(노조임시대회결의)는 데서 구했다. 이처럼 기업주의적 노조는 기업의 안정과 성장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합리화조치를 수용하고 거기에 협력해 나갔다.
  노사관계가 융합적 관계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조합으로부터 노동자의 이탈이 한층 두드러졌다.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사생활형 합리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난 노동자의 조합귀속의식 저하는 1975년 이후에는 노조조직율의 하락이라는 현상으로 표면화되었다. 전후 일본의 노조조직율의 추이를 보면, 1949년 55.8%를 정점으로 급락하던 조직율은 춘투개시연도인 1955년 이후 별다른 변화없이 1975년까지 20년 동안 35%선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융합적 관계로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1975년 이후
에는 다시 조직율이 급격한 하락세를 보여 1983년에는 마침내 29.5%라는 30% 이하의 수치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직율의 급격한 하락 배경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융합적 관계로의 진전 속에 노동자들에게 노조의 독자적 의미 자체가 상실되어 버렸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노사의 경계가 사실상 모호해지는 융합적 노사관계가 구축된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은 의미를 상실한 조합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춘투의 성격변화와 생산과 분배 전영역에서의 강력한 기업주의적 노사관계의 구축은 일본의 노사관계가 협력적 관계에서 융합적 관계로 변모했음을 시사해 준다. 70년대 중반 경제상황의 변화를 계기로 기업주의적 노조운동 세력들은 기업의 안정과 성장을 지향점으로 하는 노사일체, 기업공동체의 관념을 전면화하며 생산성 향상과 합리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또한 임금투쟁에서도 경제정합성론에 입각해 노조 스스로 임금인상 요구를 자숙하는 면모를 보였다. 생산영역에서는 물론 분배영역에서도 노조가 기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강력한 기업공동체의 구축 속에서 노사는 대립과 협조의 관계를 넘어 긴밀히 결합해 갔다.
            
  1. 대립적-협력적-융합적 노사관계로의 전환에 대한 시기구분의 근거와 새로운 용어에 대한 체계적인 정당화가 필요할 것이다. 보충설명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 발표문은 박사논문(일본적 생산·노동방식의 특징과 형성요인에 대한 연구)의 한 절에 해당하는 글이기 때문에 다소 간의 압축과 논리적 비약이 불가피했다. 오늘 발표를 통해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다음 두가지다.
  첫째, 노조가 생산영역, 현장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생산영역, 현장에서 노조가 이탈하면, 필연적으로 뿌리가 썩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일본적 생산방식의 핵심적 내용이 생산영역에 대한 경영측의 재조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생산영역에 대한 노조의 개입과 장악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연관된 얘기이지만 두번째로 지적할 것은 현장투쟁에 기반한 산별을 조직하지 않으면 중앙이, 위부분이 썩어들어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적 노사관계의 역사적 시기구분과 관련해 본 논문에서는 생산영역에서의 권력관계, 노조의 전략노선 등과 연관해 크게 3시기로 구분해 서술하고 있다. 조금 단순화시켜 얘기하면, 생산영역에서 노조가 개입하며 적극적으로 자기 위치를 차지하려 했던 시기를 대립적 시기, 생산영역에서 발을 빼고 분배영역에서의 교섭에 중점을 둔 시기를 협력적 시기, 분배영역에서도 노조가 기업주의적 가치를 내재화하며 기업에 양보하는 시기를 융합적 시기로 규정하고 있다.    

  2. 대립적 노사관계에서 협조적 노사관계로 변화되는 배경에 대해 지도부와 조직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현장 내부의 노동자들은 그런 변화를 어떻게 느꼈는지, 저항을 한 것인지, 지지를 한 것인지, 지도부와 현장의 조응에 대해 설명해주기 바란다. 특히 총평, 동맹, IMF-JC 3자 사이의 관계, 전략, 상호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나열화시키고 있다. 자료부족을 인정하더라도 아쉬움이 남는다.  
  ; 지적하신 대로 당시 현장노동자들이 어떻게 변화를 느끼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 비어있다. 현장동태, 행위패턴, 노동자 의식 등을 긴밀히 연관지어 보여줄 수 있는 자료를 구하기가 어렵다.
  50년대 직장투쟁의 전개과정과 이후의 변화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리면, 노조의 직장투쟁에 대해 회
사측은 고립화 전략, 직제층 장악을 통한 노조 분열전략을 통해 제2조합을 육성·강화해 나갔다. 친회사적인 제2조합하고만 교섭을 하며 그들에게 상당한 임금상승을 비롯, 여러 가지 혜택과 보상을 해 주었다. 반면 제1조합에게는 배제와 탄압의 전술이 구사되었다. 일반조합원들이 계속 불이익을 감수하며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국 조합원들은 제2조합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노조의 기업별 수준 대응의 숙명적 한계일 수 있다. 문제는 패배한 투쟁을 어떻게 수습하고 어떤 교훈을 도출하며 조합원들에게 무엇을 교육하여 계급적인 진전을 이루어 낼 것인가가 고민되어야 하는데 투쟁의 마무리, 수습과정도 실패했다고 보여진다. 조합원들에게는 투쟁하면 나만 손해구나 하는 패배의식만 남게 되었다. 또한 직장투쟁에 대한 총평의 지침이 올바랐던가 하는 문제도 있다. 어떤 경우는 그냥 몰아부치며 수위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직장투쟁이 패배하며 총평은 이제 직장투쟁은 안된다라는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직장투쟁이 효율적인 노조운동을 방해했다는 지적을 하면서 직장에서의 활동을 상부와 현장을 그저 연결시켜 주는 매개역할 정도로 한정시켜 직장투쟁의 의미를 낮추면서 현장 활동가들의 역할을 축소시켰다. 지도부는 직장투쟁의 패배를 발전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노선 전환의 근거로 사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총평의 노선전환은 커다란 문제가 있다.    

  3. 춘투는 산업별 공동투쟁으로서 임금인상과 임금격차 축소 효과가 있다고 말했는데 당시 일본은 지역별, 규모별 임금격차가 상당히 컸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독일처럼 직능으로 횡단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임금격차를 축소시키려면 새로운 산업별 공동투쟁이 전개되었어야 할 것이다. 춘투의 내용과 그 결과로서의 임금격차 축소의 내용에 대해 설명해 주기 바란다.  
  ; 춘투를 통해 노동자들이 높은 임금인상을 쟁취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임금인상 효과를 일부 경제학자들은 춘투의 효과가 아니라 노동시장 측면에서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에 동의할 수 없다.  
  임금수준 격차는 기업별 노조의 한계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축소 폭이 그렇게 크지는 않다. 그러나 그 격차가 워낙 컸고 공동투쟁을 하면서 최저임금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정도라도 축소된 것이다. 500인 이상의 기업을 100이라고 하면 30인 이하가 60년에 46.4%, 90년 55.5%로 10% 정도 개선되었다.    

  3-1 직장투쟁에서 춘투로의 전환 이후 일본에서 임투 이외의 투쟁은 없었는지 그 여부와 춘투의 상
에 대해 보충설명 요망.  
  ; 총평의장이었던 오타(太田)는 일본 노동운동을 말하는 것은 춘투를 말하는 것과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다소 지나친 감이 있지만 상당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만큼 일본 노동운동은 춘투를 중심으로 움직여 왔다.  
  자본가 단체와 연맹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요구안을 놓고 교섭을 하기도 했지만 구체적인 임금인상 결정은 결국 기업단위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춘투는 교섭시기를 일치시키고 공동요구안을 제출해 임투를 공동으로 조직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4. 직장투쟁이 춘투로 전환되면서 생산영역에서 투쟁 공백이 나타났고 이의 원인을 총평이 춘투에만 치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기업별 노조체제에서 총평(내셔날 센타)이 명령을 내리고 동원을 한다고 해도 기업별 노조의 권력은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현장으로부터의 불만의 소리, 일상적인 노동과정의 민주화 욕구, 노동 그 자체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투쟁이 있었을 듯한데 직장투쟁이 약화된 원인에 대해 보충 설명을 해달라.    
  ; 현장의 불만에 근거한 직장 내의 문제제기도 많았고 현장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상당한 반발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직장투쟁의 패배로 힘이 약화된 상태에서 전체 운동노선이 협조적 노선으로 확대되는 경향, 총평의 노선 전환에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직장투쟁의 춘투로의 전환에 대한 논쟁은 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직장투쟁은 결국은 패배하지 않았느냐는 현실론이 득세하면서 직장에서의 현장활동을 중시하는 부분들은 소수파로 전락되고 말았다.    

  5. 합리화 공세에 대한 총평의 입장은 무엇인가? 형식적으로는 거부입장을 취했는데 실제수준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전략의 미스인가? 역관계에서 밀린 것인가? 구체적 분석을 한다면 한국 노조운동에 시의적절한 교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보충 설명 요망한다.  
  ; 현실분석에 문제가 있었다. 50년대 1차 합리화 당시 자본은 대대적인 설비기술을 도입하면서 노무관리의 혁신을 이루었다. 그러나 총평은 생산성향상운동이 자본의 책략이라고 한마디로 규정했을 뿐 이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치밀한 대응을 조직하지 못했다. 심지어 기본적인 현실인식에 있어서도 상당한 오류가 있었다. 예컨대 실제로 엄청난 설비투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평은 그것을 설비투자 없는 합리화라고 일축해 버리기도 했다. 대안도 추상적인 반대에 머물렀다. 사실 합리화에 대한 대응은 노동운동에 있어 매우 어려운 문제다. 잘못하면 수구적으로만 보일 수 있다. 노동진영은 반대할 것은 반대하고 사안에 따라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노동측의 적극적인 행동프로그램(적극적 작업조건 개선 프로그램 등)을 마련하여 공격적 요구를 조직해야 한다.    
  ; 합리화 문제는 구체적으로는 작업장 수준에서 전개되지만 개별 수준에서의 대응이라는 건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이는 정치권력의 문제다. 이는 법적인 수준에서 법적인 강제력을 가지고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조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법적으로 강제해야 한다. 노동조합이 개별기업수준에서 아무리 싸운다하더라도 경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노동조합은 생산성 연합으로 빠질 우려가 크다.
  산별을 건설할 때 관료화 문제 등을 경계해야겠지만 산별로 나간다는 것은 정치권력과 대응한다는 지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매수, 합병 매각, 소유권 이전, 현지공장 진출 등의 문제를 개별 기업차원에서 방어하고 대응해야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연대하여 저지해야 한다는 것도 공허한 말일 수 있다. 1차적으로는 조직적인 연대, 더나가서는 정치적으로 삼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6. 노동자들이 대량소비 시대에 돌입하면서 사생활형 합리주의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노조 입장에서도 문제이지만 사측에서도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사측은 QC 등으로 극복했는데 노동자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합리성이 어떻게 조직의 이익을 우선하는 QC라는 걸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보충설명을 요청한다.  
  ; 이 부분에 대한 분석은 미흡하다. 노동자들 소외가 늘어나고 물질적 풍요가 있으니까 소비생활에 만족을 추구하면서 노동자들은 생산으로부터 이탈해 갔다. 이런 상황에서 QC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 자체를 지양하지는 않았지만(새로운 형태의 재생산) 뇌없는 기계와 같은 반복적인 노동으로부터 이제는 노동자들이 노동과정에 참여해서 발언하도록 유도했다. 강제성이 전제된 참여구조지만 노동에 대한 의미부여와 참여를 유도하여 현장으로부터의 이탈을 저지했다. 강제와 동의의 기제가 동시에 작동하면서 노동자를 포섭시켜 나간 것이다. 경영측은 현장으로 더욱 개입해 들어가고, 노조측은 생산으로부터 발을 빼는 현상에 의해 60년대부터는 현장이 경영의 독무대가 되었다.

  7. 일본의 경우 최근 노조의 의미가 약화되고 있고 노동자들이 노조로부터 이탈하고 있기는 하지만 노조조직률이 제로는 아니다. 노조원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조원의 자격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노조 조직률이 제로가 되지 않는 이유는?    
  ; 일본 노조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기업의 CI(corporate identity)운동을 모방한 '유니온 아이덴티티 운동'의 전개를 통해 노동자들의 노조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키고자 했다. 로고를 만들고 레크레이션 프로그램도 개발하고 조합원에 대한 다양한 부가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노조차원의 사회적 서비스를 통해 조합활동을 재활성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유니온 아이덴티티 운동을 분석한 한 조사에 따르면, 일본 노동자들은 오히려 노조가 다양한 사회적 서비스보다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임금, 노동조건 확보)에 충실할 것을 원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노조는 노동자의 요구가 다양화되니까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서비스 활동을 전개한다고 하지만 정작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활동에 충실할 것을 원한다는 역설적 결과를 보여준 것이다. 현재 계속 조금씩 조직률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며, 노조는 사실상 반전의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8. 노사관계를 노자관계로 확대해서 분석해야만 노동운동 전반을 풍부하게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자본축적 변화와 노동운동의 변화와의 관련, 정치적인 역관계는 어떠했는지 설명해 주기 바란다. 우리 나라 노동운동에의 시사점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일본노동운동의 탈출구가 없다고 하는데 전세계적 경향으로 볼 때 하부로부터의 투쟁이 활성화되고 있는데 일본은 어떠할 것이라고 예상되는가?  
  ; 논문은 기업내 수준으로 한정해서 분석했다. 이후 사회구조를 포괄해 좀 더 입체적으로 분석하려
고 한다.
  정치적 역관계 문제를 공산당에 한정해서만 본다면 일본 공산당은 과거 치명적인 잘못을 범했다. 총평이 출범하며 노조운동의 기틀이 만들어지는 시점에서 일본 공산당은 코민포름의 지시하에 지하투쟁, 무력투쟁을 선언하며 노동운동과의 결합에 실패하였다. 이후 자기비판 속에 노선전환이 이루어지긴 하지만, 노조운동 형성기의 좌익소아병적인 무리수로 인해 노조운동과 결합하지 못한채 줄곧 외곽에서 비판자의 역할만 하고 만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노조운동이 우리 노동운동에 중요한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50년대와 60년대의 일본 노조운동의 상황은 어느 점에서 우리와 유사한 점이 있지 않은가? 강력한 산별을 건설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중앙집중을 만능으로 생각하는 경향, 현장에서 빠져나가 위에서 제도교섭 등으로 노동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은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산별체제 속에서도 현장에 대한 권한이양을 적극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좀 더 연구조사해 볼 생각이지만 현장활동가에 대한 활동영역의 보장, 그들의 활동공간을 열어주는 것,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 산별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좀 더 고민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래로부터 자생적 비판이 올라오게 하지 않으면 중앙조직은 관료화될 수밖에 없다. 현장으로부터의 비판을 재생산할 수 있는 구조, 중앙과 현장의 상호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구조를 통해 노동운동의 지속적인 자기갱신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산별건설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9. 일본 노사관계를 포드주의를 극복한 사례로 볼 것인가? 발제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 개인적으로는 일본적 방식을 억압적 포스트 포드주의라고 규정하고 싶다. 일본적 방식은 통상적인 포드주의와 다르다. 테일러·포드주의가 인간을 뇌없는 기계로 취급하는 것인데 반해, 일본기업은 노동자의 경험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포드주의와 차별되는 포스트 포드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성격이 억압적이기 때문에 억압적 포스트 포드주의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 포드주의라는 용어를 쓰지만 결코 일본적 방식이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통합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내재적인 특징으로 자본주의에서는 항상화되는 문제다.  
  ; 억압적 포스트포드주의라는 용어는 일종의 형용모순적 느낌이 있다. 포드주의는 노동자를 억압하고 파편화시키는 억압적 노동조직 방식, 노동관리 방식이다. 이것에 반해 포스트포드주의는 해방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QC가 노동자의 지력을 동원한 것인지는 논쟁이 있다. 포드주의는 각국마다 다르게 발전해 왔다. 이렇게 다른 포드주의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의 추상수준에서 정리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일본은 근본적으로 직무분할을 통한 단순화된 업무의 반복이라고 볼 때 포드주의 범주이다. QC, 제안제도를 도입했다고 해서 포드주의를 탈각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포스트포드주의가 해방의 의미를 포괄한다고 본다면 일본은 그렇지 않다. 사회 관계는 억압적이지만 기술 관계는 민주적이라고 보는, 즉 사회와 기술 관계를 분리해서 보는 방식이다.    
  ; 거듭 말하지만 구상과 실행의 분리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내재적 특징이다. 지력동원이라고 해서 모두 노동자에게 이롭지는 않다. 강제적으로 동원되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동원된다는 의미에서 전통적인 테일러·포드주의와는 다르다.  
  ; 일본적 생산방식을 참가적 포드주의라고 개념화한적 있다. 자본주의하에서 포스트포드주의가 전혀 불가능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볼보 등의 예가 있다. 전통적인 방식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분업의 측면, 기술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에서 노동운동의 실천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현장수준에서 민주화, 인간화를 지향하는 모델로서 노동운동의 전략을 설정할 수 있다. 억압적 포스트 포드주의는 용어의 사회성, 보편성 측면에서 일반화에 문제가 있다.    
  ; 포스트 포드주의 논의가 노동의 인간화, 좁은 의미의 생산방식의 변화, 말하자면 노동과정적 측면에서만 얘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확대되고 있다고 본다. 포드주의적 노동자들이 원자화, 분자화되어 계급 주체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계급론적 함의, 복지국가를 넘어선 경쟁국가를 제기하는 등의 국가론적 함의 나아가 포드주의에서는 노조가 있고 노동자들이 조직되어 있으니까 노사정이 복지국가를 만들었지만 이제 계급이 없어졌으니까 신사회운동으로 전환하자는 내용까지 복잡하게 제기되고 있다. 포스트 포드주의를 자본주의 안에 있지만 진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자본의 포섭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노동자와 기계 사이에 노동자의 창의로 간극이 만들어져서 자본의 포섭을 내용적으로 벗어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의미까지 확대되고 있다. 우리 나라가 포드주의 단계인데 이것이 심각하니까 포스트 포드주의로 전환하자는 제기를 하는 학자도 많다. 담론체계를 그대로 답습하여 포스트 포드론자들이 제기하는 계급론, 사회운동까지 포괄하여 우리 나라의 진보 운동에 적용시키는 근거가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 용어에서 혼선이 있는 것 같다. 대처주의를 포스트 포드주의시대로 보고 있다는 학자도 있다. 조절주의 틀이 포드주의에 비해 바람직한 실천적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사회 구조 전반의 변화를 조절이론이라는 틀을 가지고 축적 체제와 계급 파편화, 문화가 중심이 된다든지, 소비가 중심이 된다든지 통칭해서 포스트 포드주의라고 보는 층도 있다. 문화적 상부구조로서 포스트 모더니즘도 있다. 그러나 노동과정, 작업과정의 포스트 포드주의는 조절이론 틀도 있지만 넓게는 브레이버만에서 연유한 공장시스템에 국한해서 보는 것이고, 규범적 의미가 강하다. 파편화, 노조 조직률이 낮아지고 노동자가 원자화, 개인화되는 경향을 포스트 포드주의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직접 생산과정에 얼마나 참여할 수 있고 그들의 창의성, 지식, 숙련을 얼마나 높여낼 수 있고 생산현장내에서 인간관계, 사회관계에서 얼마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척도로 보는 측면에서 대단히 규범적 의미다. 기존의 억압체제보다는 진보적이다. 사회시스템 전체로 보는 건 아니지만 노동운동 입장에서 보면 추상적 의미에서 노동의 인간화, 산업 민주주의 지향점을 목표로 놓고 보는 것이다. 작업장 체제 내로 국한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 지금은 전환기이다. 포스트 포드주의라는 용어보다는 유연적 축적체제로 규정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최근의 포스트 포드주의의 논의지형은 노동과정론에 한정해서 규범적 의미로만 얘기되고 있지 않고 정치적 지향과 노동과정, 국가, 문화, 시장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해 논의되고 있다. 최근의 포스트 포드주의에 대한 논의는 노동과정론을 예외로 놓고 그것을 규범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 포드주의 개념이 그렇게 규정되어 지고 있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옳다고 보고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포스트 포드주의가 아니라 유연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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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참고자료] 일본 기업별노조의 역사와 교훈 서울본부 2005.11.22 88
33 [참고자료] 지역노조의 역할과 과제를 탐색한다(토키타 요시히사) 서울본부 2005.11.22 41
32 히로사와 동지에게서 온 편지입니다. 서울본부 2005.11.21 44
» [참고자료] 일본의 기업주의적 노사관계의 형성과정에 대한 검토 서울본부 2005.11.20 46
30 [참고자료] 일본노동운동(이원우) file 서울본부 2005.11.20 36
29 [참고자료] 일본 노동자교육의 역사적 전개와 교육투쟁 서울본부 2005.11.20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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