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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kilsp.jinbo.net/publish/97/9709-10.htm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현장에서 미래를] 1997년 9월호

노동자교육포럼
일본 노동자교육의 역사적 전개와 교육투쟁


-미이케(三池)쟁의에서의 노동자교육활동을 중심으로-


고 경 임 / 숙대 교육학과 박사과정 수료

 

 

1. 글머리

1990년대 이후 한국 노동운동내의 노동자교육은 그 동안의 침체를 극복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동시에, 최근에는 전국조직의 교육체계 수립과 산별조직 건설을 위한 노조교육의 중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후자의 과제는 일단 현실 노동운동에서 요구되는 교육의 조직, 내용의 체계화라는 맥락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교육의 내부 동력이 되어야 할 생산현장 또는 단위 노동조합의 교육활동이 침체되어 그 극복의 방향은 뚜렷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물론 지난 몇 년 동안 전노협이나 노동교육협회, 부산노동자교육협회 등에서 노동조합 교육활동에 대해 조사, 연구, 평가하면서 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해왔다. 이들의 연구결과에서 시사받을 수 있는 점은 신경영전략이라는 자본의 공세로 인해 노사관계의 지형변화가 유도되고 있다는 것과, 그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대중들의 의식 및 생활상태의 변화가 중요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 할 수 있는 노동자교육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즉, 변화하는 생산현장과 노사관계의 지형에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또는 정체성의 형성과정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 형성의 핵심기제로서 노동자교육의 다양한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산별수준의 노동조합 교육조직 및 내용의 체계화를 위한 시도와 같은 속도로 진행되지는 않지만, 생산현장과 계급적 노동자를 동력으로 한 교육조직과 내용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양자를 결코 분리시켜 사고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이 글에서는 산별노조를 중심으로 한 대립적 노사관계가 실패하면서, 기업별노조 중심의 협조적 노사관계가 주축으로 되어있는 일본노동운동 내에서 노동자교육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또한 협조적 노사관계 전환점으로 평가되는 동시에 생산현장과 노동자계급 의식형성을 직접적으로 매개한 미이케(三池)노동조합의 교육을 통한 투쟁사례를 검토함으로써 노동자교육의 방향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전후 일본노동운동과 노동자교육의 전개

일본 노동자교육은 노동조합운동과 맥을 같이 하면서 발전·쇠퇴의 경로를 거쳤다. 따라서 그 과정을 전후 노동조합운동의 전개와 관련한 노동자교육의 역할과 특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산별·총동맹의 노동자교육

: 자본의 노동자교육 추진에 대한 대응(노동학교, 투쟁교육)

패전후 일본의 노조운동은 기아와 인플레로 인해 생활방위와 조직화를 위한 투쟁이 전개되었고, 1946년 8월에는 전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산별회의)와 일본노동총동맹(총동맹)이라는 2개의 내셔널센터를 갖게 되었다. 총동맹은 전전(戰前)의 전통을 이어 각지에 노동학교를 열었지만, 그 내용은 노동자의 일반적 교양강 의에 머물렀다. 1946년 1년간 어느정도 교육활동을 행했던 단위조합은 5,000개 조합 중 30% 이하였고, 조합원교육을 위한 조직과 기관을 가진 조합은 23%정도였다.

47년 3월, 산별회의, 총동맹이 포함되어 젠로렌(全國勞動組合連絡協議會)이 결성되고, 위로부터의 간부중심, 파업만능 편향에 대한 반성과 함께, 조합원의 계급적 자각에 기반한 자발적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47∼48년에는 산별·총동맹을 망라하여 노동학교가 일제히 전개되었는데, 이는 극동위원회의 '노동조합의 16원칙'과, 미점령군의 노동자문위원회가 근대적인 노사관계의 확립, 노동조합 '건전화'라는 입장에서 노동자교육을 장려하게 되면서 더욱 촉진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산별회의는 노동조합교육협의회를 결성하고, 제4회 대회에서 전후 처음으로 체계적인 교육방침을 확립하였다.

(2) 총평의 노동자 교육 : 반공·반투쟁적 교육

그러나 이러한 교육방침이 실행되려던 49∼50년에 미점령군과 일본의 지도층은 공산당과 산별회의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으며, 산별회의는 타격을 받고 공산당은 사실상 비합법화되면서 총동맹과 반공·민동파를 중심으로 하는 총평이 결성되었다. 당시 산별회의의 교육은 파업만능주의 편향속에 '투쟁 즉 교육' 일색으로 점철되어, 노동학교도 이 혼란과 격동 중에 큰 후퇴를 하였고 총동맹의 교육내용은 한층 반공·반산별 색채를 강화시켰다. 이에 총평도 반공강령을 내세워, 사회당 일당 지지의 실패했던 방침을 취한 것이 그 후의 '전투화'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한계가 되었다. 이처럼 일본안보체제의 확립에 의해 일본의 진로를 둘러싼 2개의 노선 대결이 명확하게 되자 중요한 사상투쟁의 일환으로써 노동자교육도 드디어 그 계급성과 과학성을 자문하게 되었다.

(3) 노동운동의 재생과 노동자교육 : 직장투쟁과 학습의 결합

전후 제1 반동기의 엄격한 시련에 속에서 미제국주의의 정체를 간파할 정도로 자각하게 된 노동자는 1950년대 전기, 기지반대, 원폭금지를 중심으로 한 평화운동과 '합리화'반대, 임금인상투쟁을 계기로, 투쟁하지 않는 간부를 넘어서 직장·지역 대중투쟁을 전개했다. 그 힘에 의해 총평도 '평화 4원칙' 채택(제2회 대 회), 국제자유노련에 일괄가맹 거부(제3회 대회), 52년에는 '파괴활동방지법', '노동법규 개악' 반대의 통일파업을 결행했으며, 53년에는 전산, 탄노의 임금인상, '합리화' 반대투쟁이 직장과 지역을 기초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그중 탄노의 63일 파업으로 알려진 산코렌(三鑛連)의 '영웅 없는 113일의 투쟁'(1953년)과 후쿠리쿠(北陸)철도의 '노동협약투쟁'(1952년)은 노동조합의 교육학습운동에 획기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개척했다.

이러한 투쟁의 공통된 특징은 '간부투쟁에서 대중투쟁으로'라는 슬로건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노동조합의 기본적인 요구실현, 즉 조합의 주인공인 조합원 개개인의 자각과 자주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조합원을 소수의 직장투쟁위원회로 조직하여, 노조의 기초조직이 단순히 상부기관의 지령을 기다렸다 실행하는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직장노동과 생활실태에 기반한 구체적인 제요구를 상부에 반영하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 해결하는 권한과 기능을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조합원의 철저한 논의가 중요시되고, 구체적인 요구와 정세, 자본의 공격, 적과 아를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것, 요구실현을 위한 전술, 투쟁형태에 있어서도 과학적으로 지도하는 능력을 갖는 학습과 토론이 불가결하였다. 이로써 노동자교육의 기본적인 형태의 하나로서, 직장을 기초로 한 자주적인 학습서클이 싹트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1950년대 전반의 노동자교육의 재생과 발전을 측면에서 지지, 촉진시킨 요인은 다음과 같다.

① 생활기록 작문운동 : 문집 {나의 집}, {나의 어머니}, {어머니의 역사}]에서부터 그 내용도 직장·숙사·동료의 것으로 발전하여 방적노동자의 인간형성과 연대의식을 기르고, 오미겐시(近江絹擡)의 '인권투쟁'과 결합하여 계급적인 자각으로 단련되어 갔다. 이렇게 전개한 생활기록, 노래, 토론 등의 서클활동이 노동자교육의 대중적인 발전을 측면에서 지지했던 것이다.

② 52년 10월, 노동자교육협회의 창립 : 탄노, 지파(紙パ)노련, 자치노, 젠센바이(全專賣), 그외 많은 노동조합과 학자, 지식인과의 협력에 의해 창립된 협회는 당초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교육, 학습활동을 위한 서비스기관으로 생겼지만 설립과 동시에 {사회과학기초강좌}(전6권)를, 53년에는 월간잡지 {학습의 벗}을 간행했으며, 조합의 강좌, 노동학교의 강사 알선 등을 행했고, 이윽고 관서노동자교육협회(53. 11)를 시작으로 지방의 노동자교육조직이 서로 협력하여 결성되면서 노동자교육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③ 제3회 세계노조대회에 참가한 일본대표단의 역할 : 이 대표단은 세계노련에 대한 분열공격(국제자유노련의 결성, 1949년 12월)과 투쟁했던 각국의 노동조합이 어떻게 분파주의를 극복하여 통일과 단결을 쟁취했는가에 대한 경험과 교훈을 감동깊게 배워 대회의 기조보고와 결의집을 간행하고, 전국 각지에서 보고를 수행했다. 이것은 재생하고 있던 노동조합운동과 교육활동을 활성화하였다.

④ 중앙노동학원 : 그 전신은 1918년으로, 전전에는 노자협조주의적인 것이었지만 전후 1951년 경영난 때문에 대학은 법정대학에 합병되고 별과가 독립하여 중앙노동학원이 되었다. 이후 동경문과아카데미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안보투쟁과 미이케투쟁의 노동자교육

: 대중투쟁과 통일투쟁의 변증으로서의 교육

50년대 후반의 일본 노동조합은 '한국전쟁특수'에 의해 다시 복귀한 독점자본의 '기술혁신'과 '자동화'의 도입으로 본격적인 '생산성 향상운동'과 대결하게 되었다. 각종 훈련, 제안제도, 직장간담회, 노사협의회로부터 지주제도, 사내예금제도에 이르는 다면적인 운동의 전개에 대해, 지파노련은 이것을 노동자에 대한 사상공격으로 중시했으며(55년 8월 대회), 총평도 이에 대항하는 전면적인 대책으로 교육문화활동을 강화하고, 서클 활동가, 학자, 예술가와 함께 국민문화회의를 설립하여(1955. 7), 전국 연구집회 등을 전개했다. 이에 상응하여 {경제학교과서}(소련과학원경제연구소편,1955년간)를 널리 보급하여, 학습서클, 노동학교 등에서 학습하도록 했으며, 북해도 단위노조 학습서클협의회가 생겨(1958. 9) 활동가 양성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 때 산코렌의 113일 투쟁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미쓰이미이케(三井三池)노조의 '사키사카(向坂)교실'이라고 불리는 교육학습활동이 한층 조직적,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미쓰이미이케노조의 교육·학습활동은 직장(지역)연구회(직장·사택에서의 대중토론), 지부연구회(구체적인 정세토론과 이론학습) 및 학습서클(횡단적인 활동가 중심의 고전, 학습지에 의한 집단학습)의 3가지 형태로 체계화되었으며, 구주대학의 교수진에 의한 사회과학의 고전학습 등이 실시되었다. 이는 구체적인 주제의 학습과 이론적, 추상적인 교육을 결합시키려는 것으로, 당시 노조 교육활동의 전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총평결성의 정신으로 돌아가서'라고 부르짖으면서 전투화하는 총평으로부터 탈퇴한 4개 단위산별(全織同盟, 海員組合, 全映演, 日放勞)과 총동맹이 합류하여 만든 [전노회의(全勞會議)](54. 4)는 일본생산성본부(55년 발족)에 가맹하여, '생산성 향상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이것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포기하는 것으로서 오늘날 우익적 조류의 근원이 되었다.

특히 안보투쟁은 노조가 미일안보조약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과제에 대한 대중적인 교육학습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여 대량의 새로운 간부와 학습활동가를 만들었다. 공산당이 안보투쟁의 교훈으로부터 배우고, 50년대의 단결과 노선의 실패를 극복하여 강령을 확립한 것은 그후 노동운동과 노동자교육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미쓰이미이케의 지명해고반대투쟁은 직장투쟁과 직장을 기초로 한 교육학습으로 단련된 미이케노동자들의 불굴의 투쟁과 안팎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 그 근본적인 요인은 ① 총평·사회당 블럭의 지도가 이 공격의 본질이 일본의 석탄산업을 와해하여 일본의 에너지 자원을 미국석유독점자본의 지배하에 두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미이케의 직장투쟁에 대한 공격으로 협소하게 받아들여 현장노동자의 전투적인 에너지를 기업내 국지전에 가둬둔 경제주의적·기업주의적인 지도에 그친 점, ② 그로 인해 이것을 산업별 통일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것과, 안보투쟁과 결합하여 통일전선적 규모에서 투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반공주의에 기반하는 사회당 지지를 고집하는 총평의 내셔널센타로서의 지도의 한계와 더불어 협소한 경제주의적·기업주의적인 직장투쟁 만능주의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즉 '간부투쟁에서 대중투쟁으로'라는 직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학습운동은 적극적인 새로운 국면을 열어 많은 교훈을 남긴 반면, 노동운동 전체에 직장투쟁 지상주의적인 편향을 만들어 경제주의적인 지도와 결합했던 것이 치명적인 한계였다.

그러나 60년대 초에 나타난 니탄다카마츠(日炭高松), 후루카와메지리(古河目尾)의 '합리화' 반대투쟁, '기업폐쇄'에 대한 산교시키(三協紙器), 젠킹(全金)일본롤지부(도레이공장)의 투쟁, 동경지방쟁의단 공투, 全日 自勞의 失對중지반대투쟁 등은 미이케에 이르는 직장과 지역을 기초로 한 교육학습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안보투쟁의 교훈을 배우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즉 이들의 공통점은 ① 직장을 기초로 하는 학습 토론을 철저히 기본에 두면서 ② 그 관점을 일직장·일기업의 노동내에 한정하지 않고 지역의 노동자, 주민의 상태와 요구, 전국민적인 과제와 연관시켜, 기업내의 열세를 지역공투로 만회하고, 역으로 지역통일 전선의 힘으로 적을 포위하기 위한 토론과 학습이 발전했다는 것이다.

(5) 노동자교육의 제도화 : 진전과 한계

기술혁신, QC 등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관리, 기업내 교육, 학교교육 등 매스컴을 동반한 사상공격은 급증한 청년노동자에게 안보번영의 환상을 갖게 하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조합은 65년 이후 총평을 포함하여, 교육활동의 중요성을 확장하여 그 제도화와 체계화를 추구하였다.

총평의 67년도 운동방침, 교선집회의 '노동자교육의 개선에 대한 제안' 등에 나타난 공통된 특징은 ① 초급, 중급, 간부활동가 등 대상별 교육의 체계화, ② 독자적인 교재, 통신교육 외 시청각 교육수단 등의 채용, ③ 튜터(Tutor)의 양성 등이다. 이로써 노동조합교육활동은 일정한 전진과 성과를 올렸지만, 고도경제성장 정책에 대결하려고 하지 않았던 총평의 사회민주주의적인 경제주의와 관료주의적인 지도가 강화되는 가운데, 노동조합 교육활동은 사실상 계급적, 대중적 발전을 방해받고 왜곡되었다.

총평의 춘투 중심 활동속에서는 어떠한 형식의 교육제도가 만들어졌다해도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노동자교육의 목적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것이 반영되어 직장을 기초로 한 학습서클이 활력을 잃고 정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총평산하의 전국금속은 조합원 교과서({사회의 구조와 노동조합} 1971. 9)를 만들어 조합원교육에 조직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교육활동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고, 운수일반(당시 전자련)도 {노동조합원 교과서}(1973년 간행, 79년 개정)를 만들어 조합원교육의 제도화와 체계화에 전념함으로써 더욱 진전된 교육활동을 실시, 정착시켰다. 전의노관신지협 주최의 '관동의료노동학교'와 1963년이래 동경의노련의 '하계 노동학교'는 67년이래 매년 3일간 합숙, 연속강의와 반별 자주적 토론이라는 형식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최되어 일정의 성과를 올렸다.

(6) 1970년대 일본 노동자교육의 특징과 과제

① 오늘날 노동전선의 우익적 재편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동맹이나 조류가 정부나 자본의 원조하에 후지(富士)정치대학이나 각종 조합주의 노동운동 연수회 등을 통해, 반공주의와 노자협조주의 교육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여기서 '단련된' 청년노동자가 직장에 계통적으로 배치되는 것만이 아니라, 지역에서 '반공전사'로서 독점의 지역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은 절대로 경시될 수 없다.

② 노동조합이 행하는 산업별, 업종별 각종 연구집회가 해마다 확대되고 있다. 이것은 비인간적이고 황폐한 직장과 산업의 실태로부터, 기술향상을 원하는 노동자의 절실한 요구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산업이나 서비스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탐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아가 국민과 연대하여 산업·지역의 민주화를 위한 정책이나 제도연구에까지 진전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집회의 확대는 80년대의 전면적인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더욱 중요하다.

③ 춘투의 패배, 총평 지도부의 우경화 경향속에서 계급적,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정세학습, 과제별 학습, 기초이론 학습 등이 정착되고 있다. 동시에 '가을 학습대교류집회'(통일노조간부와 노교협의 공동주체 또는 협찬), '직장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전국집회', 그외 다양한 청년, 부인의 학습교류집회를 통해 특히 청년, 부인, 미조직 노동자의 연대와 학습을 격려하는 것 역시, 한층 발전시켜야만 하는 과제이다.

④ 이 가운데 노동자교육협회와 학습조직이 다양한 시행착오와 곤란을 극복하면서 30년의 활동을 통해 {학습의 벗}을 무기로 직장·지역의 학습서클, 노동학교, 노동자 통신대학이라는 3개의 축을 형성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전국 학습활동가의 헌신적인 노력과 노동조합외의 민주·평화단체의 협력을 통해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교육활동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3. 미이케투쟁에서의 노동자 교육

몇 가지 논쟁점에도 불구하고 일본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교육의 역사상 노동조합 교육활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고 있는 미이케투쟁(1960년 1월∼10월)의 노동자교육을 검토해 보자. 이 투쟁은 당시 자본의 합리화에 대한 불굴의 반대투쟁으로서 8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검토대상이 되고 있다. 더불어 이 투쟁은 신경영전략이라는 자본의 합리화정책에 곤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 노동조합의 교육활동에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1) 미이케투쟁의 의의

313일 간의 장기파업으로 상징되는 미쓰이미이케의 대쟁의가 종식된 지 벌써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합리화를 둘러싼 노사투쟁에 국가권력이 전면적으로 개입하여 결말을 지었다는 것이 미이케쟁의의 큰 특징이었다. 그 와중에 조합측은 분열을 피할 수 없어, 10년 후, 제1조합은 종업원이 8,500명에서 1,800명 (21.2%)으로 되고, 갱외 약 5,000엔, 갱내 약 1만 엔의 차별대우 하에서, 방별(方別)파업을 주요무기로 하 여 투쟁하고 있다. 제2조합 발생 = 조직파멸이라는 종래 일본노동운동의 상식에서 본다면, 미이케 제1조합 이 심한 차별대우 속에서도 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점은 주목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이 투쟁을 지지한 것은 직장투쟁, 지역조직과 주부회, 학습활동의 세 가지로, 앞의 두 가지는 세 번째 학습활동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고 주체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학습, 교육활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2) 미이케 학습활동의 성립

가. 학습집단성립의 제계기 (1945∼1950·51)

미이케의 노동자는 전전·전중을 통해 유명한 후카가와 노무정책(深川勞務政策 : 産業報國魂)에 물들어, 전후에도 잠시 그 전통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1946년 2월 16,000명(제작소 제외)을 조직한 미이케 탄광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다음과 같은 조건에 의해 비로소 조합에 의한 학습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1) 당시의 탄광노동의 상황 : 합리화의 주된 발현 형태

황폐한 전후산업에서 석탄산업의 위치는 컸다. 증탄을 지상명령으로 부여하는 미점령사령부(GHQ)는 주식의 증배할당(특배)으로 노동자를 장려했지만, 물자특배만으로는 보상되지 않는 저임금과 과중노동이라는 열악한 노동조건하에서 탄광노동자는 피폐해 있었고, 미이케노조는 자본에 대한 투쟁보다도 노사협조·생산 제일주의에 경사되어 있었다. GHQ의 위협과 압력, 그 위세를 탄 회사에 의해 노동자는 '휴식도 반환된 채 노동강화에 의한 증탄'을 강행당했다. 게다가 1949∼50년의 레드퍼지 때문에 미이케노조원 197명이 해고되었다. 그 외 보건경시 때문에 1947년 9월∼50년 9월까지 규폐환자 87명(규폐발병률은 미이케가 전국 최고), 사망 10명, 퇴직 24명이 발생했다.

조합은 이러한 사실을 거의 알지도 못했고, 계속되는 해고에 대해 반대했지만 저항은 하지 않은 채 눈물을 흘리며 인정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2) 주체형성의 제요인

이 시기의 노동자교육 학습활동은 크게 나누어 두 개의 조류가 있다. 하나는 점령군과 관청에 의한 노동자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적 노사관계의 확립, 민주적 노동조합의 육성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탄련의 노동학교와 후쿠오카(福岡)군정부 노동과에 의해 1949년 5월 오우시타(大牛田)지 구에 설립한 노동학교가 대표적인 것으로, 1951년 4월말 현재 수강자가 42기 1,724명(남 1,626명, 여 98 명)에 달한 것은, 이 시기의 계몽교육활동으로서 크게 평가되었다. 물론 '위로부터'라는 한계는 있지만 당시 이러한 지적 분위기가 존재한 것은 학습주체형성에 큰 힘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후자의 경우는 '위로부터'의 육성지도 외에 '아래로부터'의 조합원 자신에 의한 학습(노동자의 자기교육활동)으로, 1947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1947년경 미이케읍에 거주하는 노동자와 지식인 등이 [미이케정치문화협회]라는 문화단체를 결성하여 각종 강연회나 하기강좌 등을 주최하였다. 이 운동이 그곳에 참가한 미이케노조의 조합원을 통해 미이케노조의 본소, 삼천지부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등장한 것이 궁포지부에서 결성된 동창회 운동으로, 12∼13명의 동지에 의해 결성된 동창회에서는 회비를 걷어 잡지를 구입하거나 [에르프루토 강령비판] 등의 교재를 중심으로 연구회를 열었다. 이러한 운동의 주도자는 후에 미이케투쟁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미이케노동자의 몇 가지 특성이 존재한다. 우선 <표1>에 보여지는 것과 같이, 미이케탄광노조는 다른 곳과 비교하여 교육수준이 높다.





















 


불취학 또는 

소학교 중퇴


소학졸


고소졸


중학중퇴


중졸


전문이상

미이케탄광 

전구주 평균


1.3 


19.0


13.5 


56.0


64.7 


6.6


5.3 


8.9


13.4 


0.4


0.3 


-


        
<표1>탄광 노동자 교육정도 비교(%) (1948)

[미이케 10년] 각종 통계표에서 발췌, 159쪽


㉠ 종전에 따른 제대병, 군수산업 실업자, 군수산업에서 타산업으로 전환배치되야 할 사람 등이 쌀의 특배에 유혹되어, 미이케탄광에 많이 흘러 들어왔다는 것, ㉡ 그후 해고, 레드퍼지 등에 의해 단련된 노동자가 떠나고, 전후 입사자가 상대적 다수로 되었다는 사실은 미이케노동자가 전전·전중의 전근대적인 것으로부터 근대적인 프롤레타리아트로 바뀌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미이케경영자의 노무정책은 형식적으로는 어찌되었든, 실제적으로는 전근대적인 노무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근대적인 프롤레타리아트와 전근대적인 노무정책과의 격돌은 불가피하였다.

3) 사회주의이론의 교수주체

보통 어느 조합이나 서클의 학습회에서도 강사난이라는 문제에 부딪치고 있지만, 미이케의 학습회에는 사키사카이쯔로(向坂逸郞)라는 더할 나위 없는 강사가 존재했다. 사키사카는 노농파(勞農派)의 논객으로, 그 사상 때문에 규슈(九州)대학에서 해직되어, 전전·전중의 낭인 사이에서 문필활동과 함께 자본론 연구에 전력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마르크스 이론이 일부 인텔리에게만 결합되어 대중과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 따라서 전쟁을 막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통절이 느낀 사람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미이케노동자와의 만남을 필연적이게 했다. 그는 1951년 사회당의 계급적 강화를 지향한 사회주의 협회를 야마카와히토시(山川均)와 함께 결성하였고, 이 영향을 받은 {자본론} 학습그룹에서는 {자본론} 외에 {공상에서 과학}이나 {공산당 선언}, 그외 다른 세계나 일본자본주의의 발달사, 세계의 경제적·정치적 정세, 사회주의 운동이나 노동조합 운동의 역사도 읽혀졌다. 이상과 같은 학습 중에 지능이 우수한 노동자는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자로 육성되었 다.

사키사카의 학습에 대한 관점은 "학습회라는 것은 단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식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식만으로는 조합은 강하게 되지 않는다. 조합은 인간의 결합이다. 동지적 결합은 단순히 교수와 학생이라는 지적교류나 단순한 친목회가 아니라 동일전략과 전술에 따른 조직적·실천적 결합을 의미한다.

나. 조합개혁(대중노선)의 맹아 (1951∼53)

일본노동운동의 혼란과 정체로부터 탈피, 노동운동의 새로운 기운을 타고 미이케에서도 1951년 초, 조합 창립이래 처음으로 임금인상을 위한 장기연속파업을 경험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은 자신들의 잠재적인 힘을 명확히 발견하였다. 이 파업의 성공으로 간부에게 대중관의 반성을 촉구하고, 조합원도 투쟁하지 않고는 임금을 올려주지 않는다는 자본의 본질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실천적으로 표현한 것이 1951년 여름의 미이케노조집행부에 의해 채택된 획기적인 행동강령이었다. 교육내용에서는 거대한 세계 정세분석을 배제하고, 대신 각 조합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강조했다. 즉 대중노선의 맹아가 보였다.

특히 다음의 4항목을 내용으로 하는 교선 활동이 주목된다.

① 집행위원의 교육기관으로서 매주 1회의 노동강좌, 연구토론회

② 위원과 일반조합원의 교육기관으로서 최소한 월 1회 노동강좌, 연구토론회

③ 뉴스카(NewsCar),영사기의 구입에 의한 시청각 교육의 실시

④ 노동협약 및 노동자의 권리의식을 철저히 함

이렇게 학습그룹중심의 조합개혁으로 직장분회, 지역분회와 함께 주부회가 일상활동의 단위로 만들어져 갔다. 예컨대 노동조합에 의한 '24시간 총학습', '학습에 의한 인해전술'의 조직적 기초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2) 미이케학습활동의 전개

가. 대중노선의 정착 (1953∼1956)

이러한 대중노선은 직장투쟁·직장분회·주부회를 입체적으로 조직한 학습활동에 의해 점점 발전하였고, 1953년의 '영웅 없는 113일 투쟁'의 결과, 성곡, 미쓰이육산에서 퇴직권고 거부자 1,841명(미이케 311명)을 복직시킨 위대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것은 회사측의 전면후퇴이고, 일경련(日經連)으로서는 경영권의 방기인 것이다. 합리화의 직접적 현상인 해고를 저지한 이 투쟁은 큰 의미를 갖지만, 그 후 퇴직금을 목표로 한 퇴직자가 속출하여, 결국에는 많은 문제점을 남겼다. 이 때문에 미이케노조는 1954년도 행동지침으로 '의식주에 관한 생활양식의 개선을 지도한다'는 것을 목표로, 거주생활의 개선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생활혁명'운동으로, 여기에서 지역분회나 특히, 탄부협의 역할이 컸다. 생활혁명과 함께 '시민, 농민과의 제휴', '전화노조에 대한 해고반대 투쟁'을 위한 지역조직도 계급연대의 관점으로 발전시켰다.

나. 학습활동의 정착(1957∼1960)

장기 투쟁후, 지속적인 기말수당투쟁, 임금투쟁이 이루어졌고, 그 임금투쟁에 미이케의 직장투쟁이 강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회사는 이것을 불법적인 들고양이 파업으로 보고 임금삭감, 공장폐쇄 방침으로 나왔다. 이 투쟁과정에서 노조는 직장투쟁을 철저히 하였고, 학습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되었다. '영웅 없는 113일 투쟁'에서 이 투쟁에 이르기까지 각 지부에 지부연구회가 조직되어갔다. 여기에는 ㉠ 활동가양성을 명확한 목표로 한 행동 ㉡ 불특정 조합원 대상의 비계통적인 활동이라는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 이는 투쟁 이후 각 지부에서 특정층 활동가 양성을 위한 강좌식 교육과 일반 조합원만의 강연회식 교육이라는 두 가지의 정식으로 뿌리내렸다.

본소지부와 같이 진행된 지부에서는 이 강좌식 교육도 더욱 구조화되어, 제1학습회와 제2학습회라는 두 축의 조직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활동가에 의한 것을 제1학습회로 하고, 제1학습회의 멤버가 중심이 되어 제2학습회를 열었으며, 참가는 조합원의 자발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지부연구회에 참가한 자가 각각 직장 연구회, 지역연구회에서 일반조합원의 지도를 담당하고, 자신들의 고전학습의 성과를 실천에 응용하였다. 교 육=학습운동은 미이케노조 전체의 것으로 확대·발전하였다. 더욱이 학습단위를 지역단위, 방별단위, 직장 단위의 연구그룹으로 소규모화해갔다. 또한 1957년 총회에서는 "학습활동을 강화하여, 적계급의 선전을 분쇄하자!"라는 슬로건이, 1958년 총회에서는 "학습활동을 발전시켜 새로운 사회의 담당자가 되자"는 슬로건이 채택되었다.(<그림1>은 미이케투쟁시 가장 완성적인 구조이다.

<그림1>미이케의 연구조직구조

본부연구회

노동대학

서클 사회주의협회

동지회 노대서클

사회당社靑同 지역연구회

(5인조)조장회의의 학습화

반회의 직장 지역 주부회

학습회 연구회 연구회 연구회

<표2>미야우라(宮浦)지부 학습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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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지부전체대상

노동자의 사회과학(연속강좌) 23회

일본근대사(연속강좌) 18회

② 직장대상 : 불황과 정치,경제(강좌) 7회

③ 지부집행부대상(시사설)

예를들면 자민당의 노동정책, 춘투 등 3회

④ 지역분회장·주부회분회장대상(시사해설) 2회

⑤ 행동대대상(시사해설)1회

⑥ 주부회대상 : 민주주의와 우리들의 조직 1회 계 5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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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3>미카와(三川)지부 학습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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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지역분회(사택) 대상(시사해설) 30회

사회정세, 정부의 노동정책, ICBM, 가정생활 본연의 모습

직장과 정치운동, 춘투를 대기하며, 당시의 교육문제

② 직장대상 : 직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하여(집행부에 의한) 20회

기타 4회

③ 지부전체 대상(시사해설) 21회

사회정세, 자민당의 경제정책 / 기계화와 우리들

④ 외래분회대상 2회

⑤ 행동대 대상 8회

⑥ 불명 계 8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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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4>1958년도 노동강좌 실적표(단위, 횟수)

















월 지부 5 6 7 8 9 10 11 12 1 2 3 4 
宮浦 

西山 

三川 

本所 

港務 

製作

6 13 8 12 7 6 4 5 3 3 3 

3 3 4 3 4 4 4 4 5 4 

1 8 7 11 23 15 17 12 21 

3 8 6 1 2 2 3 5 3 

5 5 6 9 4 1 1 4 

2 1 2 2 1 1 1 2 

70 

38 

115 

33 

35 

12

8 20 36 30 30 35 29 30 26 34 12 13 303 



총원돈의의 지적처럼, 이 투쟁에서 회사는 권력적 탄압기관을 총동원한 총자본의 결집으로 대응했었고, 그런 의미에서 계급투쟁의 본질을 역력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합은 종래의 학습활동을 더욱 확대·심화하면서 대결해 나갔다.

(3) 60년대 미이케학습활동의 조직론

가. 미이케투쟁(1959∼1960)

1959년 1월 미쓰이광산은 산코렌에 제1차 합리화 안을 제시하였다. 제1차 합리화 반대투쟁은 준비부족인 채 조합이 패배하였다. 미이케노조는 제2차 합리화를 예측하여, 5월 총회에서 "투쟁은 바로 이제부터다, 자본과 용이하지 않은 결전의 준비를, '학습'에 의한 '계급적' 지력과 연대에 의해 올바르게 파악하자"라는 의지 통일을 행하였다. 미이케노조의 퇴전을 불사한 결의에 대해 회사는 제2차 합리화안을 제시하였다. 회사가 1,200명을 지명해고 통고(1959. 11)하고, 1960년 1월 미이케광업소를 폐쇄함과 동시에 노동조합은 전면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으며, 24시간 파업 313일 간을 포함하여 445일 간에 달한 대쟁의가 시작되었다.

이 쟁의의 본질은 자본이 직장활동가, 즉 자본이 생산 방해자를 지명하여 기업 밖으로, 아니 생활로부터 말살시키려는 점에 있었다. 예컨대, 자본의 의도는 단순한 합리화가 아니라 노사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합리화였다. 게다가 그것은 많은 비용과 국가권력, 전자본의 원조를 기반으로 수행되었다. 이 투쟁의 진행과정에서 노동자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붕괴시키지 않는 한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그리고 안보를 매개한 권력의 개입 증대, 제2조합의 발생, 탄노에서 미이케의 고립 등을 이유로 노조는 결국 자본이 제시한 조건으로 쟁의를 종결할 수밖에 없었다.

쟁의기간 중 학습활동이 전면 실시되었다. 투쟁 중에 지역분회는 투쟁부대이자, 오르그(Org)와 교류의 장이 되었다. 조합원의 집에서 숙박하고, 오두막집에 머물렀던 오르그(Org)의 숙박과 취사는 미이케주부회의 손으로 잘 정돈되었고, 미이케의 노동자, 가족과의 교류는 이렇게 따뜻하게 전국으로 번져갔다.

이는 분명히 일개 단위노조의 투쟁이 총노동자·전국민적인 투쟁의 양상을 띠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미이케노조 내부에서는 제2조합이 발생하여, 처음 2:1이었던 조합원의 비율이, 5년 후의 1965년에는 역으로 1:2로, 10년 후의 현재는 1:3(제1조합원 1,500여명)으로 되어 제1조합원이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확대해 갔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 미이케투쟁 이후(1960년∼)

미이케투쟁 이후, 미이케탄광의 합리화(궁핍화법칙의 발현)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직장의 인원배치의 변화 : 직접 석탄을 캐는 채탄공이 1959년에는 13,523명에 대하여 974명이었던 것이, 1961년에는 10,964명에 대해 1,556명으로 대폭 증원되었다. 그리고 기타부분의 사람은 감원되었다. 예를 들면 미이케투쟁 전에는 주요 콘베이어 1대에 1명이 붙어 있었지만, 투쟁 이후는 1명이 몇 대를 담당하게 되었다. 반면에 직제는 5명에 1명이 배치되었다(투쟁 전은 10명에 1명). 특히 1963년 11월 삼천 광의 대폭발에서 458명이 목숨을 잃고, 800명 이상의 CO가스환자를 발생시킨 것은 합리화의 결과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둘째, 제1조합원과 제2조합원의 철저한 차별화 : 제1조합원에게는 본래의 작업을 주지 않고, 잡일을 강제하며, 단숨에 일만엔 이상의 임금인하(잔업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가 행해졌다. 그러나 제2조합에 참가하면 임금상승과 호조건의 작업이 주어지고, 제1조합 탈퇴를 강요당했다.

셋째, 직제의 권한이 강화되고, 현장마다 생산목표가 주어져, 그것이 달성되지 않으면 배치 전환되거나 해고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제1조합원에게 차별을 가하고 제2조합에 많은 사람들을 가입시킨 직제는 승격될 수 있기 때문에 직제의 제1조합원에 대한 억압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상과 같은 상황에 대해, 노동자의 저항은 ①장기저항노선의 설정, ②1963년의 제3차 합리화 반대투쟁에서 부조인투쟁, ③CO투쟁의 세 가지였지만, 여기서는 학습활동에 따라 큰 의미를 갖는 '장기저항노선'과 '5인조'에 대해 알아보겠다.

1) 장기저항노선

이것은 1962년 4월, 미이케노조가 3개월의 대중토의 결과 제출한 행동방침이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지구전이고, 아군의 세력보존과 그 증강을 시도하면서 유효한 반격의 시기를 만드는 투쟁방침이다. 이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정세가 불리한 때는 유연한 구상을 취한다.

② 그러나 적의 취약점은 결단력 있게 허점을 틈타 잘 이용한다.

③ 유연하지만 끈기 있는 저항투쟁 중에 반격을 개시한다.

그러면 반격의 조건은 어떤 것일까?

① 대중의 신뢰가 지도부에 집중하고 있는가

② 아군의 사기가 왕성한가

③ 반격으로 쓰러뜨릴 수단과 목표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④ 적의 취약점에 대한 분석과 파악이 충분한가

⑤ 이상의 제조건이 구체화하고 발전하는 경우에 대담한 공격으로 넘어뜨린다.

이상의 장기저항노선을 구체화한 것이 조직론으로서의 대중투쟁노선이고, 조직화 방침으로는 5인조를 분회처럼 만들어, 생산점이 소집단으로 창설되었다.

2) 5인조

1963년 조합조직의 최소단위로 설계되어, 1964년도 대회에서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학습단위인 동시에 투쟁단위인 5인조의 성립에 의해 학습활동과 조직활동은 더욱 긴밀해지면서 대중화하여 갔다. 더욱이 1967년의 운동방침은 5인조를 조합원 의식형성의 유효한 무기로 만들기 위해 다음의 것을 결정하였다.

① 매주 화요일을 중앙집행위원회로 하고, 매월 9일은 정례 갱내입갱 점검일로 한다.

② 집행부는 3개월 1회의 본부·지부의 합동회의를 각 지부마다 행하고, 차년도의 활동방침을 만들어 간 다.

③ 3역 회의는 먼저 처음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것을 조장회의, 조회의에 전달한다. 그리고 5인조가 생산 점에서 투쟁하고, 실천했던 것을 조장회의, 3역 회의에서 집약하여 검증하고, 다음의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는 순환방식을 취한다. 이 일련의 회의를 한 단위로 최소한 2개월 이내에 1회 순회하도록 각 지부에서 구체 적으로 실행한다.

즉 매일 실천과 운동방침에 의한 토의가 연속되어 노동자 의식변혁은 급속히 고양되었다. 대중노선은 철저히 실행되었다. 일본의 노동운동이 일관성없이 해왔던 대중노선은 여기에서 대략 완성적인 형태로 정착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4. 미이케쟁의를 통해서 본 노동자 교육

미쓰이미이케쟁의는 노동운동 사상 미증유의 대쟁의였다. 격렬한 쟁의로 미이케노조도 분열했다. 쟁의 10년 후인 현재, 제1조합은 1/4이라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방별 파업'을 주무기로 저항을 지속하고 있다. 소수 조합이 되었다하더라도 제2조합에 저항하는 조합, 제2조합이 생겨도 끝나지 않는 조합이라는 것은 기업별 조합이라는 일본의 노동운동속에서 주목해야 한다. 특히 이것을 지탱해 온 직장투쟁, 지역조직과 주부회와 나란히, '3개의 기둥'의 하나인 학습·교육활동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할 수 있다.

① 미이케의 학습활동은 그것만을 본다면 선진적인 노동조합과 질적인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양적으로도 그것이 조합원의 대다수가 아니다. 그러나 미이케 각 지부의 핵심인 수십 명씩의 활동가가 학습으로 강하게 무장한 것, 많은 조합원이 "자본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 노동자는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소박하지만 정확한 확신을 가졌던 것은 높게 평가해야 한다. 예를 들면 '영웅 없는 113일의 투쟁' 때 대량의 탈락자를 낸 본소지부가 정력적인 학습활동으로 다수의 활동가를 배출한 반면, 사무계통이나 비기간직종이 많은 제 2조합에서 지도자를 1명도 배출하지 못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또한 학습스타일 부분은 오늘날 주요할만한 가치가 있다. 즉 사상이 형성되는 방식에 대해서다. 노동자에게 계급적인 이론과 사상을 밖에서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활동 과정에서 자발성이 계급적 사상형성에 얼마만큼 투여되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노동자의 사상적 발전과 관련하여 대답해야 할 문제다.

② 최근 견해를 보면 당시 선전된 미이케노동자 의식의 3개 축에 대해, '조합의 단결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긍정하고 옹호하는 X층', '경영과 경영직제에 기대하는 마음을 갖는 Y층', '경영과 조합의 쌍방에 대해 방관자의 입장에 서서 양비론과 양시론의 태도를 갖는 Z층'이라는 세 가지의 분석속에서 상황을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다.

미이케노조는 이 분석을 기초로, X층을 기축으로 학습, 특히 실천학습의 조직화를 통해 그 층을 두텁게 하고, 직장활동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Z층을 조합으로 유도하고, 직장투쟁을 통해 Y층을 고립시키면서 Z층을 조합단결에 끌어들이는 활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 특히 사상성, 윤리성(평등과 연대)을 노조가 실현해야 할 가치로서 기준화하고, 직장활동과 거주활동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채택하였다. 예를 들면 '갱내 집단의 윤번제', '생활혁명운동', '임시부의 배제', '조광권=탄광형 하청제도의 거부'라는 노동자공동체의 실현과 자각적 규율의 모색은 '노동사회'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영웅 없는 113일 간의 투쟁'(1953)시기에 조합이 했던 '지역' 조직화의 시도, '미이케주부회'와의 밀접한 협력에 의한 지역, 즉 '가족전체'와 함께 했던 투쟁, '5인조' 조직에 의한 일상적 활동형태의 창조 및 실천등은 의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종래 노조의 선전영역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생활혁명', '문화혁명'을 출현시킨 점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노동·생활·학습·교육의 통일이라는 것을 전후 교육연구 가치면에서 보면 노동조합내에서 평등과 연대의 일상화라고 하는 형태, 즉 이념형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많은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노동운동의 쇠퇴, 포스트모던이 말해지는 오늘의 상황은 30년전에 비교하면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졌지만, 교육 연구에 있어서 다시 파내지 않으면 안될 많은 광맥과 지하수가 그곳에 묻혀 있는 것을 새롭게 실감한다.

이상의 제실천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차별의 관점에서 새롭게 반성해보면 두 개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 다.

① 기업내 조합주의에 의한 계급의식의 결여(荒佃寒村) : 중소탄광 노동자의 곤궁한 상태에 대한 연대의 거부가 있었지만, 이는 미이케노조 자체보다는 상부단체(炭勞)의 지도방침, 더 나아가 일본노동운동 그 자체에서 기반한다. 이는 더욱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노동자 '계급'(의식)이 사회계층 구조내에서 분단되어 계층, 직업별 집단 및 기업별 종업원 집단(의식)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수량적으로는 임금노동자가 일본사회의 다수를 점할지라도, 계급의 일원으로서 귀속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계급개념 외에 계층·서열적 편성의 차별구조에 대한 분석이 필수이다. 미이케의 직장투쟁에 입각했던 자치적인 연대는 기술혁신, 자동화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② 노동운동과 부락해방운동의 접점에 대해서다. 양운동의 결합은 미이케투쟁에서 대중적으로 확대됐지만, 문제는 투쟁이 일상적 형태로 전환할 때, 그 결합이 충분히 심화·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왜일까? 부락해방운동측은 산업예비군의 논리와 궁핍화론에 입각하여 부락대중을 연대하는 이론구축이 불가능 했었다.

참고자료

勞動者敎育協會編, {勞動者敎育論集}, 學習の友社, 1982.

北田寬二,{1950年代의 大衆的學習敎育運動}, 노교협 회보, 36호

黑澤惟昭,{グラムシと現代日本の敎育}, 社會評論社, 1991.

黑澤惟昭,{社會敎育論序說}, 八千代出版, 1981.




토론결과 요약





미이케(三池) 노동자교육활동의 기조

- 사키사카이쯔로(向坂逸郞)는 일본에서 자본론을 번역하기도 했고, 80년대 말에 {맑스주의의 비판과 반 비판}이라는 책이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또한 맑스의 전기를 쓴 것도 있는데, 내용을 보면 이 사람이 공산당원이 되어야지 왜 사회당원이 됐는지 이해가 않된다.

- '학습하는 사상의 내용이 아니라, 사상이 형성되는 구조나 방식이 문제다'라는 말을 쉽게 설명해 주기 바란다.

: 사키사카이쯔로(向坂逸郞)가 학습써클을 처음 조직해서 자본론을 가르칠 때, 똑같은 내용의 자본론이었으나 기존의 공산당 계열의 교육과는 매우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의 학습은 이론 위주의 공부, 즉 학습내용을 숙지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현장 실천과 연결시켜 공부하도록 하는 독특한 방식을 활용했다. 그렇게 학습을 받은 사람들이 미이케투쟁을 주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었고, 그들이 노조를 장악했을 때도, 이렇게 현장조직과 연계한 학습조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미이케 투쟁에서 진행된 학습의 경우, 무엇을 공부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사상과 실천을 연결하고자 조직했고, 학습했는가의 측면을 중요시한 것 같다. 그런 학습의 스타일을 제기하면서, 사상이나 사고,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 자체에 대한 제기를 하고 있다. 외부로부터의 주입이 아니라, 자발적인 내부의 것으로부터 형성되는 과정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떤 학습 방법, 학습스타일을 얘기할 때 교습법이든가, 방식이 아니라 그것에 내재된 사상이나 의식의 형성과정과 연관지어서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 그것은 구조가 아니라, 조직방식의 문제가 아닐까? 이데올로기적으로 확실하게 호명된 상태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이데올로기적인 것들이 일상적인 삶의 조직활동의 물질적인 상태로 융해되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직자체가 탄탄하다는 말이고, 그럴 때만이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조직이 탄탄하지 않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교육쪽으로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조직이 들어왔다, 나갔다, 조금 혼란스러운 것이 있는 것 같다.

미이케노조의 학습활동 : 투쟁과 조직, 학습활동의 결합

- 그 당시 노조운동의 선진적인 층, 활동가들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 이 글을 통해서 볼때는 굉장히 선진적이라고 봐야 하는데, 미이케 노동자들의 상당히 의식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조건이 있을 것 같다.

: 초기 미이케노조에서 학습조직이 형성된 것으로부터 볼 수 있다. 여기서 초점을 맞춘 것은 흔히 지도부에서 대중을 리드해 나갈 때 간과하는 것이 대중의 자발성이라는 부분인데, 이들은 이것을 끌고 들어갔다는 점이다. 이론과 실천의 결합 형태이기 때문에, 흔히 선진노동자들의 교육이 기존에 보여줬던 양상과는 다르게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여기서는 3가지를 얘기하고 있다. 직장투쟁과 조직, 그것이 학습으로 매개되어 연결되는 것, 이 3가지가 분리되지 않고 결합될 수 있었던 것이 미이케노조의 성공요인이었다. 교육과 투쟁을 결합시키고 나아가 그것을 조직형태로 엮어나갔다.

- 한국에서도 그러한 모델을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연구소에서도 이미 현장 프로젝트를 하면서 계속 제안해 왔던 것이다. 미이케투쟁에서 5인조 조직과 같은 가장 말단 조직에서의 학습과 직장활동이 가능할 수 있는 구조, 그러려면 법적, 제도적 재편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노력은 되고 있다. 우리가 이전에 현대중공업 프로젝트를 하면서 제안해 왔고, 현재 그것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현장 활동가들이 침체된 현장의 분위기를 살려내기 위해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한편 작은 조직에서는 이미 활용되고 있다. 현대정공 같은 경우는 가장 말단 조직에서 여러 활동과 결합된 양태들을 찾아볼 수 있다.

- 그 당시 감원, 탄광의 폐쇄 등과 맞물려서 조직활동이 진행되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특정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단초들은 본 것 같다. 하나는 70년대 원풍모방 내부에 소조직이 거미줄같이 짜여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만큼 장기간 투쟁을 완강하게 버텨낼 수 있었다. 그것이 민주노조운 동의 쇠퇴와 아울러 위축되었고, 87년 이후에는 투쟁이 활발한 파업의 시기에 현장토론이 가장 하부단위까지 짜여져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온갖 주제의 현장토론이 수십일간의 파업을 유지시켜 낼 수 있는 주요한 동력이었다. 문제는 이것을 일상화시켜내고, 평상시에 현장투쟁과 더불어 학습활동이 항상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그것이 어려운 것 같다.

: 미이케노조에는 3단계가 있다. 초기 발단의 시기와 현장토론이 가장 활발한 쟁의 시기, 그리고 투쟁이 끝나고 자본의 공세가 치밀하게 들어오는 수세의 시기에 각각 전략을 짜내면서 교육조직을 만들었다. 80년대까지 여전히 수세적인 상황에서 점점 축소되면서 고립화되어 있는데도 내부에서 동력을 유지해 가고 있다.

- 한국에서도 70년대 원풍모방의 경우 상당히 많은 교육활동을 했고, 일상적인 교육활동이 당시 운동을 유지시켜주는 동력이었다. 하지만 현재 단위노조 수준에서 교육사업을 체계적으로 하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 같다. 70년대 원풍을 중심으로 하는 노조운동과 현재 대공장 중심의 노조운동과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뭘까?

: 두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원풍노동자들은 시간도 많고 부지런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현재의 노동자들은 다 안다고 생각하고, 조직만 커져서 공부할 시간도 없고 의욕도 없다고 얘기하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진다. 분명한 것은 사키사카이쯔로(向坂逸郞)와 같은 사람들이 뛰어들어서 무엇인가를 이루어 냈다는 것이고, 내용적 매개, 조직적 매개가 있었다는 것, 그런 것을 우리 주변에서 발견해 낼 수 있다면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실천학습이 이들 교육의 중요한 명제인 것 같은데, 현재 좌파의 교육운동 자체가 유명무실해진 것은 교육운동의 방식이나 마인드가 잘못되었다기보다 교육운동도 전체운동, 노조의 영향력하에 종속되어 있다는 너무 당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 같다.

미이케투쟁이 성공했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인 것 같다. 학습조직과 실천학습으로 장기간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고, 단위사업장 수준의 방어 투쟁의 성격을 넘어서서, 자본주의 자체를 지양하는 정신에 동의하고, 사업장 밖으로까지 확산시킬 수 있었다는 점인 것 같다.

미이케 투쟁의 다양한 조건

- 이 정도의 교육을 할 수 있는 노조는 거의 없다고 본다. 현재 교육활동으로 묶으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이것이 이전 70년대와 큰 차이인 것 같다. 우선은 노조집행부의 확고한 의지가 중요하고, 그것이 전제되어도 조합원들을 교육으로 조직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인 것 같다.

: 집행부의 역할이 여기서도 매우 중요시되는데, 윤리적인 도덕성을 가진 지도부였고, 투쟁기간에도 끊임없이 간부들의 교육시간표가 짜여있는 것을 보면 매우 철저하게 교육을 진행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같은 경우, 노조 간부들이 다 시간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이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성장해 왔기 때문에 투쟁기간 동안이라도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진행해 나갔다. 자본론을 몇 년에 걸쳐서 학습하고, 다음 단계의 텍스트를 또 몇 년에 걸쳐서 하고 있다. 그들이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있다. 간부들의 학습이 일상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래 조합원들에게까지 일상적인 교육활 동이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 원풍모방의 경우는 여성노동자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당시 상황에서 개인적인 문화적 생활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노조의 문화교육을 포함한 다양한 교육활동들이 노동자들의 생활속에 깊이 파고 들 수 있는 조건이었다고 보여진다. 한편 당시의 교육내용이라는 것이 사실은 매우 낮은 수준의 것이었다면 일본에서 자본론을 학습한 것은 사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는 정치적 상황 자체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높은 수준의 정치적 교육이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에서 대중적으로 진행하여 돌파해 나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 5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집중적인 교육활동의 결과가 미이케투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당시 공산당과 사회구조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있었는지, 그리고 이 투쟁이 전개되던 당시 일본 노동운동의 상황이 어떠했고, 그것이 상호 어떻게 맞물려 전개됐는지가 분명하지 않아 이 투쟁이 매우 고립된 섬같이 느껴진다.

: 영국의 탄광파업의 경우는 대처정부와 싸울 때 매우 고립된 투쟁이었다. 연대해주는 노조도 전혀 없이 거의 혼자서 1년 정도의 투쟁을 버틴 것이다. 단지 영국 탄광파업에서 특이한 점은 노동자들의 가족, 주부들 이 함께 연대를 하면서 의식화되어 이 투쟁을 유지하는 주요한 동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막판 대의원대회에서 표결할 때, 그만두자는 식의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주부들이 와서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한 기록을 볼 수 있다. 거기에서도 어떤 식으로건 교육이 이루어졌을 텐데 그것을 정확히 모르겠다. 반면 미이케 투쟁의 상황은 영국 탄광노조의 투쟁과 비교할 때 고립된 투쟁은 아닌 것 같다.

: 전국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사회당과도 연관이 깊었다. 투쟁기간동안 동원된 노동자가 32만 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는 엄청난 연대투쟁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미이케노조가 총평 산하의 노조였고, 탄광의 합리화 투쟁에서 최대한 지원을 한 것인데, 연맹 단위의 노조였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고 그 점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 미이케투쟁 이후 그 노동자들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 일본에서 70년대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보면 현재 매우 다양하다.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경우도 물론 있고, 시장에 나가 있는 사람들도 있고, 가정에 들어간 노동자들도 있고…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우리와 다른게, 지난번 총선 때 공산당이 710만표 정도를 얻었다. 한 5~600만표 정도의 고정표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최소한의 부르주아적 사상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식으로 생각하면 안될 것 같다.

일본의 경우는 교육학에도 전전, 전후파로 분리되어 소수지만 좌파이론과 활동이 계속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교육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이론도 없고 역사도 없는 것에 비해 일본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의 삶과 교육

- 미이케노조에서 진행한 노동교육을 보면 상당히 계급성을 지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거기에 의식주를 포함한 생활혁명을 밀접하게 결합시키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변혁적 노동운동이라고 해서 진행된 교육내용과 비교해 볼 때, 이러한 결합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이들이 좌파적 세계관을 가지고 각 부분에서 재해석 해낼 수 있는 이러한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인가?

: 일상생활을 상호 접할 수 있는 조직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특히 직장내에서의 일상생활은 생산과 관련된 생활을 서로 연결시켜주고 실천해 낼 수 있는 5인조 그룹 등의 조직구조를 만들어 냈다. 또한 생산현장 밖에서는 기존에 공산당에서는 착목하지 않았던 주부회나 가정생활, 지역사회와 관련된 조직을 만들고 그것과 연결되어 학습을 진행하였다. 이는 탄광지역으로서 집단적 거주형태를 가지고 있었던 특수한 지역적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형성되어 가는 의식이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이론 속에 깔고 있기 때문에, 몇가지의 계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형태의 교육이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향판의 생활혁명이라는 것이 당시 자주관리까지의 세계적인 분위기와의 연관성도 있을 것이다.

- 예컨대 스튜어트류, 즉 사회교육 형태속에서 노동자교육의 형태를 찾고자 한다든지, 노동자들의 동일한 문화정체성에 착목을 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하거나 언급을 하고 있는 경우는 있는가?

: 사회교육론이라는 것도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조금은 다른 틀에서, 즉 대안적 교육론 속에서 보려는 노력이 있다. 예를 들어 주제별로 묶어 노동자, 여성, 청소년 등 분야별로 조금은 소외된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론을 시론적 차원에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지만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다. 스튜어트 홀처럼 자신의 글로 정리된 글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 미이케투쟁 이후 현재까지 일본에서 노동교육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하는 점이 충분하게 정리되지 못한 한계가 있다. 미이케투쟁의 충분한 평가속에서 학습과 투쟁이 긴밀하게 결합되어진 모델을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진지하게 검토해 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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